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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재즈를 만나다

[30장 내려놓음]

by 노용헌 Mar 17. 2025

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               (이도좌인주자 불이병강천하 기사호환)

師之所處 荊棘生焉 大兵之後 必有凶年             (사지소처 형극생언 대군지후 필유흉년)

故善有果而已 不敢以取强 果而勿矜                 (고선유과이이 불감이취강 과이물긍)

果而勿伐 果而勿驕 果而不得已 是果而勿强      (과이물벌 과이물교 과이부득이 시과이물강)

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                     (문장즉로 시위부도 부도조이)     


노자 도덕경 30장에서는 ‘목적을 이루되 뽐내지 않고(果而勿矜), 목적을 이루되 압박하지 않으며(果而勿伐), 목적을 이루되 교만하지 않고(果而勿驕), 목적을 이루되 꼭 필요한 것만 하라(果而不得已)’고 말한다. 욕심을 버리고, 욕망을 내려놓을 때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자는 ‘이루었다면 때를 알고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고(善有果而已), 감히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不敢以取强)는 것’이다. 예술가가 작품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소설가의 절필 선언과 같다. 더 이상의 창작을 할 수 없는 상황 또한 있다. 그것은 저자의 죽음이다. 또는 저자가 신체적, 물질적, 정신적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물론 미완성의 작품들도 있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꽃피우는 순간인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순간도 있고, 꽃이 떨어지는 순간(花無十日紅)도 있다. 욕망 덩어리인 인간으로 내려놓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윤동주 시인은 서시(序詩)에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노래한다. “삶의 유일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이다.”라고 말한 카뮈의 말을 되새기면서, 나의 욕심 때문에, 그리고 나의 교만 때문에, 움켜쥐었던 것들을 “내려놓음”에 대해서 성찰해본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사진의 복제성과 대중성에 대해서 배웠다. 자신은 유물론적 사유를 한다고 했지만, 벤야민의 사상은 신비롭다. 그의 유명한 ‘아우라(Aura)’의 개념이 그것이다. 그의 삶은 평생 구차하게 살았으며, 어떤 영광도 누리지 못했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무덤조차 어디 있는지 모른다. 사진은 특성상 무한복제가 가능하다. 예술작품 또한 기술의 발달을 통해 무한복제 가능해졌고, 예술작품의 진품성과 같은 ‘아우라’는 이제 전시장에서만 느껴질 뿐이다. 현대는 무엇이 원본이고 복사본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더군다나 AI 시대까지 이르렀다. VR(virtual reality, 假想現實)→ AR(Augmented Reality, 增强現實)→ MR(Mixed Reality, 混合現實)의 시대를 거쳐 AI(Artificial Intelligence, 人工知能)의 시대이다. ChatGPT나 DeepSeek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이 넘쳐난다. 컴퓨터의 인공지능 서비스는 소설도 만들어주고, 음악도 만들어주고, 영상도 만들어준다. 저작자는 단지 컴퓨터에 질문만 던지면 그대로 컴퓨터 생성해준다. AI 시대 아우라는 어떻게 되는가? 롤랑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저자는 사라지고, 그것을 보는 자, 그것을 소비하는 자만 남았다.     

 

케이트 브라이언(Kate Bryan)이 쓴 <불꽃으로 살다>에는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예술가 30명의 이야기들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 갑작스런 죽음을 예견하고 기성 미술계와 불화하면서 짧은 기간 예술혼을 격렬하게 불태우거나, 죽고 나서 지나치게 신화화되거나 삶이 오해되기도 한다. 시대를 앞서간 작품을 하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생전 인정을 받지 못하기도 한다. 그들 중 프란체스카 우드먼(Francesca Woodman)은 22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을 선택했다. “나는 다양한 성과물을 온전히 남겨 둔 채 일찍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를 죽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의 만들었던 예술작품만이 남게 되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쓴 마지막 일기에서 자신과 자신의 작업을 과거 시제로 언급했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보는 일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언어를 발명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다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Francesca Woodman-    

  

재즈 피아니스트의 거장, 재즈계의 쇼팽으로 불리는 빌 에반스(Bill Evans)는 조지 거슈윈과 함께 미국에서 상당히 대중적 인지도가 높다. 재즈와 클래식과의 퓨전 장르를 개척한 그의 작품들은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대표작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곡은 ‘Waltz for Debby’(1962)이다. 안타깝게도 스콧 라파로는 클럽 빌리지 뱅가드에서 녹음을 마치고 열흘 후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https://youtu.be/dH3GSrCmzC8?si=ZGtnvgM78BgYwSb2).  이 일로 에반스는 큰 충격에 빠져서 몇 달 동안 녹음 및 공연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말년은 불행했다. 마약 중독이 심해서 1970년대에 코카인에 빠져들었고 1980년 51세에 그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향년 51세. 주변인들에 따르면 역사상 가장 기나긴 자살과도 같았다고 한다. 실제로 애인과 형의 자살 때문에 충격이 심했다고 한다. 특히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한 앨범 제목 ‘We Will Meet Again’은 음악적으로 한없이 자유롭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힘없는 에반스 자신에 대한 한 편의 슬픈 유서를 읽는 것만 같아 가슴이 아린다. 그는 심각한 마약중독자였다.

    

“그의 연주는 역시 경이로웠다. 「I Do It for Your Love」 때는 한순간의 고통이 몰려왔지만 곧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었고, 「Blue in Green」 연주는 그 고통을 영원히 지연시키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Nardis」에서 그는 궁극의 연주를 들려줬다. 그 어떤 트리오도 이들 이상의 완전 연소는 불가능한 듯이 보였다. 세 명의 연주자는 다른 멤버의 살아 있는 서사적인 노래에 서로 감탄했으며, 존슨이 이날 그의 무용담을 펼쳐 놓는 동안 에반스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천천히 몸을 흔들고 있었다.”

-빌 에반스 재즈의 초상, P584-


Bill Evans – We Will Meet Again

https://youtu.be/ukkRs2nhfmc?si=P9bXxOykjmz_HEx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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