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색(色)]
“와! 사진 죽인다.”
“사진이야, 그림이야?”
“이 사진은 색깔(color)이 환상적이다. 현실적이지 않아 보이는 것이 아마도 인공조명을 썼거나, 포토샵으로 과도하게 색보정을 한 것 같다.”
“화이트발란스(White Balance)를 일부러 심하게 맞췄는지도 모르고.”
“사진의 기본은 첫째, 초점이 잘 맞추어져 있어야 하고, 둘째, 노출이 적정이어야 하고, 셋째, 상황에 맞게 색온도를 정확하게 설정해야 돼.”
“그렇긴 하지만 그건 기본이고, 얼마든지 자신이 변경할 수 있는 것 아니야?”
“기본도 안 갖추고, 말로만 작품인네 하는 것은 답이 없지.”
“자신이 맞다고 우기는 사람은 정말 답이 없어.”
“기록이 우선이야? 표현이 우선이야?”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
“기술의 진보는 이전보다 더 화려한 색을 보여주지.”
“16비트 컴퓨터에서 24비트 컴퓨터로 발전되었고, 256 컬러에서 트루컬러(Truecolor)는 16,777,216개의 색상을 사용할 수 있어.”
“뉴턴은 색을 프리즘을 통해 백색광이 분해되는 과학적인 결과에 의해서라고 보지만, 괴테는 빛과 어둠 사이의 상호작용과 인간의 심리적 반응에서 색이 발생한다고 주장해.”
“괴테는 색상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개인마다 느끼는 정서가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괴테는 파랑, 빨강, 노랑의 세 가지 기본색이 있고, 따뜻한 색상과 차가운 색상으로 나누고 있지.”
“보는 이에 따라, 보는 위치, 시간, 장소에 따라, 달리 보이고, 고정된 색채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색은 항상 다르게 보인다는 괴테의 주장에 동감해.”
색(色)에 대한 생각들은 각기 다른 경험에서 그것을 느끼는 감정들은 모두 다르다. 빨간색은 죽음과 파괴, 인간 본성과 남성적인 에너지를 상징한다면, 파란색은 여성적인 에너지를 상징한다고 한다. 태극기의 빨간색과 파란색은 음과 양을 상징한다. 빨간색은 진보의 상징색이고, 파란색은 보수의 상징색이다. 이것은 그저 가정일 뿐이다. 이 두 가지 색상을 섞으면 보라색이 된다. 보라색은 신비의 색이고 오컬트(occult)와 연관지어 추측하는 것 또한 음모주의자들의 연장선이 될지도 모른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빨간색과 파란색 약을 선택하라고 제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세상은 사실 이보다 더 하다. 우리는 미스터리(mystery)한 현실에서 이도저도 아닌 것들을 단지 자신의 경험치에서 해석하려 할 것이다.
카페의 창문에서 바라본 도시의 가로수들이 완연한 늦가을을 예고한다. 바람이 간간이 불어 은행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듯 떨어지고 있다. 은행잎들의 색은 짙은 노란색을 띄고 있다.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서 그 노란빛은 색을 더한다. 밝은 노란색이 되기도 하고, 칙칙한 노란색이 되기도 한다. 같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은행잎들마다 각기 다른 색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논산의 쌘뽈(saint paul) 양로원에서 할머니 수녀를 만나고 나와 만났던 은행잎 정자는 내게 잊지 못할 노란 물결이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전청조 사건으로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유명인을 대상으로 사기 사건을 넘어서 언론의 관심은 전청조의 성별 논란이었다.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남성으로 가장을 했던 것이다. 전청조에 대해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의혹들이 언론에 추후 공개되었지만, 이런 사기행각에 이렇게 당할 수도 있구나하고 씁쓸하기만 하다.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인터넷에서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페이스북이나 SNS를 통해서 김 카스트로(Kim Castro)는 유명하다. 남성인데도 여성으로 가장한 인물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훨씬 더 많다. AI로 만들어낸 이미지는 너무나 현실적인 가상현실을 더욱 극대화한다. 무엇이 현실인지 모를 정도이다. Google Cloud와 DeepMind는 협력하여 AI생성 이미지를 워터마킹하고 식별하는 도구 SynthID(신스아이디) 베타 버전을 출시하기까지 이르렀다. 우리는 아마도,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라(복제된 이미지)와 시뮬라시옹(모방된 현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무엇이 모방된 복제된 색인지 분간이 안 되는 시대. 무엇이 자연색인인지, 인공색인지 모를 시대.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한 사진가 A의 페이스북 계정이 있었다. 그의 사진들은 다큐멘터리를 지향한다고 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여기는 사회적 사진들이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쏭 사진가를 좋아하고, 거리에서 사진을 주로 찍고, 시장의 사람들의 포츄레이트를 찍었다. 그런 사진들을 그의 계정에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느꼈던 점은 그의 많은 팔로우들 중에 한 여성의 댓글이 유독 많다는 것이었다. 그 여성 B는 사진을 배우고자 하고, 자신은 회화적인 느낌이 있는 사진들을 지향하지만 샘(A라는 남성)의 사진을 좋아하고 응원한다는 댓글이었다. 그러나 그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을 들어가 봤다. 댓글을 유독 많이 남기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그 여성의 계정은 많은 사람들이 팔로우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남성 계정보다는 여성 계정에 유독 많은 남자들이 팔로우한다. 얼굴이 반반하거나, 나이가 그리 많지 않다면 남성들의 눈길을 끄는 요소가 충분할지 모른다. 그녀가 올린 글들은 대부분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지 모르지만 아프다는 글이 많이 올라왔다. 건강검진으로 발견된 혈액암으로 병치레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 SNS상의 친구들, 힘내라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남자들의 계정에는 댓글을 달지 않는 사람들도, 알지도 못하는 여성의 계정에는 일일이 댓글을 남기는 사람들의 심정은 무엇일까. 관심 종자들은 사실 넘쳐난다. 물론 온라인이니까. 오프라인으로까지 연장해서 만나질 않으니까. 물론 오프라인으로 연장해서 만남을 진행하는 사람들도 없진 않다. 어쨌든 유독 여성 계정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그런데 이런 계정이 A라는 남성의 부계정이었다. B라는 여성의 계정은 A라는 남성의 가상 SNS친구였던 것이었다. B는 A의 성별이 다른 아바타(Avatar)이다. 그는 한 인물이면서 두 명의 남녀인 셈이다. 이런 사실이 발각되어서인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 B라는 계정은 폭파되었고, A도 사라졌다. 진실은 허구의 또 다른 거짓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고, 누군가는 진짜로 믿는다. 세상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이러한 질문을 사진가 안마이 레(An-My Lê)는 하고 있다. 레는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으로 순수예술(Fine Art)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과 허구를 모호하게 만드는 작업은 우리에게 무엇이 다큐멘터리이고 무엇이 순수예술인지 그 경계를 질문하고 있다.
“I am 신뢰”
나는 완전해. 그리고 내게는 모든 것들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막연하고 어리석어 보여.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건 껍질에 지나지 않았어. 우연히 네가 반쪽이 된다면 난 너를 축하하겠다. (...) 너는 너 자신과 세계의 반쪽을 잃어버리겠지만 나머지 반쪽은 더욱 깊고 값어치 있는 수천 가지 모습이 될 수 있지. 그리고 너는 모든 것을 반쪽으로 만들고 너의 이미지에 맞춰 파괴해 버리고 싶을 거야. 아름다움과 지혜와 정당성은 바로 조각난 것들 속에만 있으니까.
-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