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날 쳤잖아. 그리고 튀었잖아. 그건 뺑소니잖아..
정신을 차린것은 넘어지며 엉겹걸에 짚은 손바닥으로 한박자 늦은 통증이 올라올 때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필 겨를도 없이 쓰라린 손바닥을 치켜들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핏방울을 발견한 재영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아으.."
흐르는 피와 엉겨붙은 모래를 살살 털어내고 있자니 이내 쪽팔림과 황당함이 치밀어 올랐다.
"거 앞좀 보고 다닙시다!..."
"괜찮아?"
"...이게 괜찮..!! 어어어?!"
사고를 낸 당사자는 바닥에 널부러진 재영을 위아래로 훑고는 짧게 한마디 던졌다. 그리고 그녀의 잘못을 한껏 채근했어야 했을 그의 다음 말이 목구녕으로 튀어 나오기도 전에 고개를 돌리고는 달려오던 방향 그대로 달음질 치기 시작했다. 야야. 이거 뺑소니야! 너어어!!
"이보세요!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닙니까!"
당연하게도 재영의 외침은 닿지 않았다.
원맨쇼가 되어버린 그의 촌극은 이내 창피함이 되었고 별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옷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어냈다. 정말이지 빌어먹게도 날씨가 좋은 어느 여름날의 사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껏 찌뿌둥한 하루의 말미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에이씨 왜 반말이야.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주섬주섬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챙기는 와중에 자신의 것이 아닌 휴대폰을 발견한 재영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주변을 한번 둘러 본 후 그것을 주워 가방에 넣었다.
'그러게 사과를 했어야지.'
스마트 폰이 한두푼도 아니고 새 것 같은데 전화를 걸어 올 것이다.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낼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도 될 까 싶을만큼 정중한 사과를 받아내지 않고서는 이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재영은 생각했다.
웃기지도 않은 충돌 사고를 겪고 나니 몸 속에 아드레날린이 도는 것 같았다. 하찮은 분노와 통증을 잊을 만큼의 쪽팔림이 지난 며칠간 머리속을 떠나지 않던 무력감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왜인지 모를 작은 흥분감으로 재영은 조금은 발걸음이 가벼워 진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것도 이벤트라고 느끼는 건가..'
재영은 최근 심한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모든것이 덧 없이 느껴졌고 그 중에 제일은 자신이라고 여겼다. 마치 타임루프에 같힌 것 처럼 몇년 동안 똑같은 하루를 되풀이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딱히 무언가 달랐던 하루가 있었을까? 왜 이런 무의미한 날들이 반복되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뚱이는 왜 서서히 시들어 가는걸까? 활력이 넘치던 때가 존재하기는 했을까? 무엇을 위해서 사는걸까? 이렇게 사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들은 텁텁한 모래와 같았고 입 밖으로 나오는 모든 말들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 같았다. 가만히 있는 저 하늘마저 매일같이 형형색색 다른 옷을 입고 다른 표정을 짓는데 숨가쁘게 살고 있을 자신은 오롯이 회색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듯 했다.
심각한 번아웃에 오염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달리 어쩔 도리는 없었다. 혼자만 몇 배의 중력을 견디고 있는 것처럼 무거워진 몸과 느려진 머리는 도무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서 콱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지만 그는 안다. 이 잠깐의 독기는 정수리에서 온 몸으로 쏟아내는 신경 안정제 같은 무기력 감으로 희석되어 내일이면 다시 살기위해 살아내는 몸뚱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내는 노예 비슷한 무언가가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위기의 순간이 끝났음을 감지한 재영의 본능은 그를 다시 반복되는 상념의 현실로 끌어내렸다.
'연락 하겠지. 아..뭐라고 하나..돌려달라고 하겠지..귀찮다.'
자신을 치고간 뺑소니범(?)의 존재를 마음 한 귀퉁이로 던져버린 재영은 황망히 위를 올려다 보았다. 왜서일까. 딱히 저 하늘 위의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은 아니었는데. 무더운 여름밤의 서막을 알리는 곤색 어둠이 서서히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덥네..'
그렇다.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