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을 모른다.
곰곰이 따져보니 지난 10년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산 듯하다. 실상은 그 보다 더 할지도 모르고 인정하긴 싫지만 정말 긴 시간 동안 일반적이지는 않게 살아왔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10년 이상의 시간을 허투루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니까.
아버진 적당히 보고 배워서 그에 걸맞은 적당한(내 깜냥에 맞는) 기업에 들어가서 적게 벌더라도 꾸준히 벌길 원하셨다. 적게 벌면 덜 쓰고 안쓰면서 두 내우가 끌어주고 밀어주며 애가 나오면 그 실정에 맞게 또 아끼고 모으면서 그렇게 살길 원하셨다. 마흔을 넘긴, 여전히 애송이에 불과한 아들의 모습을 보고서는 어느 정도 내려 놓으신 것도 같지만 통화를 하건 집을 다녀오건 맺음말은 한결 같으시다.
"이제라도 어디 공장에 들어가서 자분자분 모으고 살어. 너도 곧 늙는다. 노후는 어쩔거여. 길바닥에서 죽을래?"
정 안되면 들어와서 농사일이나 배우라는 들으면 뼈 아프고 한 때는 증오해 마지않았던 그러나 이제는 애정 어린 걱정이라 생각하며 웃어넘길 수 있는 마무리 펀치까지 깔끔하게 날리신다.
"예~봐서요."
송곳처럼 쏘아 붙이던 예전에 비하면 엄청 유해진 아들놈의 대답을 귓등으로 쳐내시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면서 가라고 하시고는 트로트 프로그램에 집중하신다. 부자는 이제 안다. 잔소리도 그냥 하는 거고 대답도 그냥 하는 거라는 걸. 잘 가고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말에 불과하다는 걸.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이게 큰일이 나버린 것이다.
관성처럼 그냥 살았던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지루하고 고통스러워지고 불안해진 것이다.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 아버지의 오랜 잔소리가 불현듯 나타나서는
"나여. 니 현실. 어마어마하지?"
"기회가 있을 때 잘 좀 혀지 그랬어?"
"어금니 꽉 깨물어. 좀 아플 것이여."
10년 후도 모르겠고 당장 내년엔 올 가을엔 아니 다음 달, 아니 다음 주, 아니 내일 아니!
오늘. 오늘조차도 그냥 살아있으니까 사는. 사는 대로 생각하는, 어쩌면 생각조차 없이 그냥 아메바처럼 아, 아메바는 자가번식이라도 하는 건가..
공기도둑, 탄소배출물.
세상의 온갖 무용한 것들을 갖다 붙여도 부끄러워지는 삶을 살고 있는 나. 그렇다고 생각하니 너무 괴로운 나만 남았다.
일견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이리도 가혹할 수도 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낄 만큼 생각 없이 살아온 지난날에 종지부를 찍을 계획이 필요하다. 얼마나 지켜 나갈지 알 수 없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까.
반나절에 걸쳐 끄적거리면서 계획이란 걸 생각해 봤지만 딱히 어떻게 해야 나의 삶이 변화하는지에 대한 가늠이 서질 않는다.
"저는 과학자가 될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이.."
"저는 연예인이 되고 싶습니다."
좋았다 그 시절. 막연한 꿈이 목표가 되고 계획이 되지 못한 것은 참 아쉽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면 완전한 실패는 아니지 않을까...
누가 그렇다고 해줬으면.
해서, 이제라도 계획이란 걸 세워보기로 했다. 목표라는 걸 상정해 보기로 했다.
남은 인생의 전반이 그럴 수는 없겠지만 부디 향 후 10년이라도 혹은 그 이하의 시간 아니, 단 한 점의 순간이 될지라도 목표를 달성했다는 그 짜릿한 희열을 맛보고 싶어졌다.
계획을 세우자. 목표를 만들자.
그래. 다음 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