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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정 Jul 07. 2024

똑똑한 사람은 말을 쉽게 한다

좋은 강연을 들으면서

요 며칠간 좋은 강연들을 들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 지적인 소양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처음 해보는 작업을 하면서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간절하게 느꼈던 것 같다.



안진수 교수님 강연


세미나의 주제는 "한국영화의 재현 변화 양상: 언술 행위의 표현력과 신체의 의미에 주목하며"라는 강연이었다. UC버클리에서 동아시아 언어와 문화학(특히 한국학)을 가르치는 안진수 교수님의 강연이었다.


강연에 대한 설명글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교수님은 한국의 역사가 어떤 식으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영화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먼저 흐름을 설명해주시고, 민주화 이후에 나왔던 현대영화들에서 대사와 배우가 신체를 어떤 식으로 이용하고 그걸 감독이 어떤 식으로 찍었는지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보여주셨다. 특히 류승완 감독 특유의 말맛이 사는 대사"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라던가, 살인의 추억에 나온 "밥은 먹고 다니냐"와 같은 대사를 함께 보면서 이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컨텍스트가 얼마나 다양한지, 또 상황에 따라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한 양상을 다루셨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베테랑에 나오는 정만식 배우의 대사였는데,


" 이 양반들이 또 뼈에 사무치는 소리 늘어놓고 계시네... 나도 듣는 귀가 있어요, 상무님아. 여기 배고프고 성실한데 겁 없는 애들 많아. "


이 대사가 영화를 봤을 때랑 강연 때 굉장히 다르게 보여서놀랐다. 영화를 볼 때는 그냥 아 저 사람 진짜 나빠 보인다 이 정도였는데, 강연 때는 밑에 영어 자막이 같이 나와서 한국어 대사가 어떤 식으로 번역되었는지 볼 수 있었다. 역시나, 영어에는 저 말맛과 특유의 비아냥대는 느낌이 살지 못했다. 특히, 높은 사람을 말하는 상무님에 '아'라는 어미를 붙여서 위협감을 주는 그 느낌이 전달이 안되었달까?


교수님의 강연이 영화를 한국 고유의 역사적, 언어학적, 문화적으로 접근하여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신 것 같아서 매우 즐거웠다. 만드는 입장에서 다른 영화를 분석적으로 봐야 할 때가 있는데, 나는 관람자에 입장에서 몰입하는 편이라 어떤 방식으로 분석해서 봐야 할지 모를 때가 참 많은데 새로운 시각이었다.


강연 초반에 감독님이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와 에피소드를 설명해 주셨다. 인디아나존스와 스타워즈 포스터를 보여주시면서 자신의 취향은 이렇다고 말씀해 주셨다.


조지루카스의 빅팬이셨던 것 같은데, 어릴 때 그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내서 비서로부터 답신을 받았다고 한다. “조지 루카스 씨는 원래 이런 선물을 받지 않지만, 저희가 예외를 한 번 만들어보겠습니다”라는 두 문장의 답장이었다고. (고약하고 바쁜 양반... 뭐 Thank you라는 말 쓰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ㅋㅋ 어쨌든 센스 있는 비서였다.) 그 이야기를 하실 때 교수님 얼굴이 그때로 돌아간 아이 같아서 엄청 귀여우셨다.



에릭오 감독님 강연

픽사 출신에 본인의 단편작품이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애니메이션계의 아이돌로 유명한 에릭오 감독님. 절대 본인이 스스로를 아이돌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지만ㅎㅎ 인터넷에 팬들이 부르는 말이다. 근데 뭐… 아이돌 맞다. 잘생겼다.


내가 막연하게 애니메이션이 좋고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에릭오 감독님을 티브이 강연으로 알게 되었다. 아니, 이렇게 어린 사람이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았어... 커리어가 너무 화려한 거 아니야? 게다가 아버지가 휴보를 만든 카이스트 교수님이라고...? 뭐야 이 사람 디즈니 캐릭터보다 더 판타지잖아…하는 질투반 호기심반으로 모든 강연을 찾아보았다.


이번에는 한국독립애니메이션 협회의 오픈특강으로 직접 만나 뵐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보니까 연예인 같기도 하고 엄청 신기했다. 그리고 강연을 엄청 엄청 열심히 준비해오신 게 너무너무 느껴졌다.


도리를 찾아서에 나오는 문어 Hank 러프드로잉


감독님 어린 시절 사진부터 서울대학교 회화과 시절에 그렸던 초대형 졸업작품도 보여주셨는데, 무려 2mx2m짜리 작품에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그린 작품이었다. 나는 사실 그 그림이 있었기 때문에 오페라라는 작품도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릭오 Opera

Opera는 감독이 원하는 장면을 관객에 전달하기 위해 장면전환과 편집이 많이 들어가 있다기보다는 전체를 하나의 회화작품처럼 보여준다. 그래서 그 장면 안에서 관객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작품을 보고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달까? 그게 에릭오 감독이 다른 장르와 기술을 넘나들어도 드러나는 본인 작품의 특징이다. 그는 언제나 보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선이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생각하면서 작품을 만든다.


시스티나 성당 벽화

우리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누군가와 같이 봤다고 치자. 아마 그 미술관을 나오면서 대화를 나눠보면 서로가 주목했던 인물들은 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악마를, 누군가는 천사를, 누군가는 머리가 잘려가는 여자가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을 다시 보러 가면 또 다른 장면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사실 극영화에서 이런 시도는 많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감독들이 자기만의 이스터에그를 숨겨놓거나, 새로운 내러티브 구조를 시도해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작품 자체가 관람자가 얼마나 다양하게 느낄 수 있는지 고려하고 제작한 영화는 아직까지 많이 없다고 생각한다.


감독님이 질의응답 시간에 말씀해 주셨는데, 자기는 한 가지 작업만 진행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 작업을 할 때 다른 형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다른 프로젝트를 같이 병행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태도를 유지한다고 했다. 일단... 첫 번째로 그게 가능하다는 그의 실력이 부러웠고(체력과 지구력도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노력도 재능이야), 두 번째는 아직도 그렇게 궁금하고 호기심이 많은 그 태도가 너무 부러웠다. 나는 내가 이 일을 하면서 지금 느끼는 이 설렘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항상 의문인데, 그는 여전히 소년 같고 여전히 세상에 자기가 모르는 또 해보고 싶은 일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 많다는 얼굴이다.



똑똑한 사람들은 말을 쉽게 한다


두 가지 강연 다 내용도 너무 좋았지만 그보다 더 그 시간이 즐거웠던 것은 강연을 하는 사람의 준비성과 사려 깊은 마음씨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 분 다 공통적으로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취향이고, 어떤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까지 오픈해 준다는 것은 청자로서 굉장히 고맙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분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 준 이유는 이 강연을 하나의 의견으로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생각과 취향을 갖고 있으니 제 강연에서 의아하거나 반대되는 의견이 있다면 참고해 주세요라고 사전에 인사를 건네는 그런 말이라고 생각했다.


똑똑한 사람들은 말을 쉽게 한다. 그들은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권위 있는 자에 말을 빌려오지 않고도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전달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새로운 시각과 접근법을 설명하는 것임에도 일상적인 단어로 문장을 만들어낼 줄 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고민하고, 방황하고 또 나름대로 분석하고 겪어보면서 그렇게 단단해졌는지 감히 예상조차 할 수 없다.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남의 이야기도 잘 듣는다. 본인이 강연자임에도 청중을 경청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질의응답을 할 때 더 빛이 난다. 질문을 하는 사람의 말속에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 그 짧은 시간 동안 애를 쓰고,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고 적절한 말을 고른다.


요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면서 위로하는 접근 자체를 아예 꼰대라고 뭉뚱그려서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그래서 내가 좋은 어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또한 더더욱 말을 아끼고 조심하려고 한다. 너무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어른들이 아이에게 혹은 경험자가 유경험자에게 해줄 수 있는 좋은 이야기들을 말하기 어려워지는 사회가 되는 것 같아 걱정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나는 좋은 어른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에게 응원을 받기도 했고 때로는 현실에 대한 쓴소리를 듣기도 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꼰대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이번 두 강연의 강연자들에게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꼰대가 아닌 좋은 어른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솔직하고, 어렵고 그럴듯한 말을 해주기보다는 진심을 전하려고 한다. 그런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그런 어른들이 많기를 바라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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