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를 읽고
파주에 왔다. 충동적으로 어디든 떠나고 싶었는데, 이전에 왔던 기억이 좋아서 지지향에 다시 왔다. 그렇게 글을 안 읽는 내가 여기서 좋은 책을 2권이나 찾아서 구매를 했고, 그 책을 계기로 지금의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뭔가 여기 오면 막혔던 일이 술술 풀리지 않을까, 영감이 될 수 있는 책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이 늘 있다.
파주는 노을이 7시 30분쯤 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식당이 7시쯤 문을 닫는다. 배가 안 고파도 6시에는 나가서 밥을 먹어야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때우지 않을 수 있다. 맛있게 밥을 먹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는데, 제일 인기 많은 창가 자리가 비어있어서 여기 앉아있다가야지하고 커피를 시켰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책장을 두리번거리다가 눈에 띄는 제목을 발견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라는 책. 그게 정말 가능해? 이건 무슨 메타포지? 그래서 궁금함을 못 참고 읽기 시작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sklh9wpXpA
말 그대로 정말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를 가진 시라토리씨와 함께 미술관에 간 이야기를 담는다. 저자는 예술학부를 전공하고 미국에서 중남미 연구로 석사를 받았으며, 유네스코 본부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만큼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고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일에 능통한 사람인데, 시라토리씨를 만나면서 많은 것을 느낀다. 정말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중에 보고 싶어서 기록하는 기억에 남았던 문장들
1.
색과 빛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시라토리 씨에게 전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빛과 색만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하고 나는 걱정했다.
나중에 들었는데 시라토리 씨는 극도의 약시로 태어나서 색을 본 기억이 거의 없고 "색은 개념적으로 이해한다"라고 했다.
색이 '개념'이라니, 대체 무슨 뜻일까.
"일반적으로 '색'은 시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얀색이니 갈색이니 파란색이니 하는 이름이 붙은 시점에 개념이기도 해요. 각각의 색에는 특정한 이미지가 있어서 그걸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그 특징적인 이미지로) 이해하고 있어요" (시라토리 씨)
그의 말은 내가 전자파나 미생물을 이해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전자파나 미생물도 모든 곳에 우글우글 있다는 사실까지는 이해하지만 실제로 목격할 수는 없기에 어디까지나 개념상의 존재인 것이다. 아무튼 시라토리 씨도 '저녁노을과 사과는 붉은색'이라고 이해하는 듯했다.
2.
시각이라 하면 '눈'과 시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뇌와 관련된 문제라고 한다.
오래전, '사물을 보는' 행위는 오늘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과 비슷할 만큼 단순한 일로 여겨졌다. 저기 있는 물체를 시야에 담기만 하면 만사형통! 자, 찍어요! 이런 것이다. 하지만 근대 과학이 발전하면서 점점 '보기'가 얼마나 복잡한 행위인지 밝혀졌다. 사물을 보는 행위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사전에 축적된 지식과 경험, 즉 뇌 내의 정보다. 우리는 풍경이든, 예술이든, 사람의 얼굴이든, 전부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기초해 해석하고 이해한다.
3.
전시장 한쪽에는 미국의 필립스 컬렉션 건물 사진이 걸려있었고, 나는 미국에서 살았던 무렵의 이런저런 추억도 이야기했다. 그런데 시라토리 씨는 작품에 관한 설명 이상으로 열심히 귀를 기울이더니 "정확한 작품 해설 같은 것보다 보는 사람이 받은 인상이나 추억 같은 걸 알고 싶어요."라는 게 아닌가.
4.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곁에 있는 덕에 우리 눈의 해상도가 올라갔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심지어 매우 자연스럽게 그럴 수 있었다. 수화기를 귀에 대면 "여보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그 당시의 상황이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게 했다. 그러니 진정한 의미로 그림을 보여주는 사람은 사실 우리가 아닌 시라토리 씨인지도 몰랐다.
5.
" 그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서 작품을 보거나 만드는 행위가 소중하다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말한 '그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서 본다'는 발언은 매우 흥미롭다. 마이티에게는 작가의 작품 제작, 미술관의 작품 전시, 관람자의 작품 감상, 이 세 가지 행위가 우열 없이 평등한 관계인 듯했다. 그리고 작품 제작부터 감상까지 이르는 일련의 계주에서 마지막으로 배턴을 받는 관람자에게는 자유롭게 작품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마이티는 믿고 있다. 그 신념은 미술 감상에 올바른 지식과 해석이 필요하다는 권위주의와 지식편향주의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다음 달에 수입이 생기면 꼭 사고 싶은 책. 파주에서 또 좋은 경험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