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을 잘하는 것 vs 일을 잘하는 회사로 만드는 것
작년 이맘때쯤 팀장을 맡았다. 팀의 이름은 그로스전략팀. 그로스해킹도 하고 전략도 하는 팀. 데이터분석을 통해 기업의 상위 전략을 도출해 내라는 의미였다. 통상적으로는 데이터팀과 전략팀이 분리되어 있다. 데이터팀에선 서비스와 비즈니스와 관련한 미세한 영역의 분석과 방법론적인 고민을 담당하고, 전략팀에선 그렇게 뽑혀 나온 분석자료를 통해 장기적인 방향성과 전사적 의사결정을 담당한다. 나는 그 두 가지를 모두 담당하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로스전략팀은 실패했다.
여러 가지 열악한 상황이었다. 일단 회사는 데이터를 중심으로 의사결정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사업과 제품 전반에 걸쳐 데이터를 통한 기획은커녕 후행적 성과측정마저도 절차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팀의 분석 의견들을 모아서 제품, 사업 조직에 피력한다 한들 유의미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적었다. 일부 경영진의 의지가 뒷받침해주긴 했지만, 실무자들의 일하는 방법 근간을 바꾸기는 힘들었다. 팀의 구성원들 또한 애초에 DA로 채용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실무 면에서도 굉장히 도전적인 상황이었다.
팀은 실패했지만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조직 내 변화를 주도하는 힘의 중요성이다. 지금까지는 일을 똑똑하게 잘하는 것이 모든 직장인에게 적용되는 중요한 역량이라 생각했다. 시키는 일도 잘하고, 시키지 않는 일도 잘하는 것. 하지만 그건 '나'를 기준으로 일을 생각했을 때이고, '조직' 또는 '회사'를 기준으로 일을 생각하면 단순히 task를 잘 처리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회사가 AI기술을 전혀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 있는 상황에서 AI 모델링을 엄청 잘하는 개발자가 있다 한들 그 사람이 무얼 할 수 있을까.
조직 내 변화를 주도하는 힘은 나의 업무 경험&지식과는 전혀 다른 영역의 역량인 듯하다. 조직 내 발언권을 가졌는지, 경영진과 밀접한 관계인지, 설득력을 가졌는지, 시기적으로 적절한지 등 '일을 잘하는 것'과는 관계가 낮은 요소들이 주를 이룬다. 어찌 보면 처세술과 화술의 영역일 수도 있겠다. 그동안 무시했던 부분들이었는데, 스타트업에서 경영자의 관점으로 조직의 변화를 만들려면 필수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애자일, 그로스해킹, OKR 같은 수많은 IT기업의 경영 방법론들을 1인이 전부 전파하고 체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물론 대단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직접 시도하고 또 실패하고 나니까 거의 신화처럼 여겨진다. 문득 커리어 면에서도 고민이 된다. 나는 일을 잘해야 할까, 일을 잘하게 만들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