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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새 Mar 06. 2020

사막에서 깊은 밤을 날아

사막같지 않은 사막에 사는, 글로벌 노마드(Global Nomad) 인생

나는 밤이 좋다. 밤에 정신이 더 또렷해지는 기분이고, 더운 날에는 낮보다 선선해지기도 해서 그렇다.

캄캄한 사위는 뭔가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어둑하지 않게 실내에 등을 환하게 켜고 있더라도 세상이 온통 빛인 낮보다는 나에게 조금 더 충실해질 수 있다.

게다가 밤에 뜨는 달은 겸손하고 은근해서 좋다. 똑바로 바라보기에 부답스럽지 않다.그래서 한참씩 올려다본다. 보름달로 환하게 비출 때조차 그 빛은 딱 좋은, 서로가 서로에게 허용 가능하다 여기는 한계를 넘는 법이 없다. 가늘고 힘없어 보이는 그믐달도 날카롭지 않은데 선명하다. 초승달은 기대를 품게 한다. 점점 부풀어 올르겠지, 그렇게 둥글어져라 어느새 응원도 하게 된다. 달은 어떤 모습이어도 달일 뿐이라 좋다.

밤에 내다보이는 풍경도 좋다. 인공의 야경이 화려해서가 아니라 적당하게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굳이 눈에 띄지 않아 좋다. 세상 가득 덮고 있는 뿌연먼지도 가려지고 운하의 색깔이 야리꾸리하게 녹색으로 탁한 것도 안보인다. 심지어 검은 운하에 비친 불빛들을 보고 있으면, 저것이 탁하든 어쨌든 물은 물이지, 고마운 것이지 하면서 마음이 녹녹해진다. 낮동안 내다보이는 풍경은 목구멍이 메마르고 매캐한데, 밤이 되면 좀 씻기는 느낌에 가끔은 청량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밤은 이 사막에 어울린다. 진짜 아무것도 없어서 안 보이기도 하고, 진짜 캄캄해서 안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진짜 봐야할 것만 볼 수 있는, 그래서 꼭 생각할 것만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으로, 둘은 쌍이다. 그리고 그 사막에 달이라도 떠오르면 밤에 딱 적당한 조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사막과 밤을 배경으로 하면, 저절로 존재, '그저 그냥 있는 채'로의 '나'에 온통 집중할 수 있다.

엥겔지수가 너무 높다며 생활비에 종종 거리고, 아이 학비 문제로 동동 거리고, 회사 상사와 잘 통하지도 않은 언어로 삐끗거리다가도 이것이 내 식구 벌어먹이는 것이라 여기며 샐러리맨의 굴욕을 하루씩만 버티며 사는 남편의 등짝도 사막 모래밭 위에서 밤이 되면 적당하게 가려지고 잊혀진다.


작년 가을에 차로 몇시간을 달려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갔었다. 아라비안 만에 닿아있는 우리집에서 서쪽, 사우디 아라비아랑 맞닿은 국경선 쪽으로 한참을 달려나가 아스팔트 길도 끝난 곳에서 다시 모래를 오래 두드리고 굳힌 사막길을 겨우 달려, 모래 둔덕 사이 천막 숙소에  날이었다. 그날  천막을 혼자 빠져나와, 천막들이 늘어선 뒤쪽 사잇길로 돌아나가 맨발로 모래 언덕을 걸어 올랐다. 낮의 해를 품고 있어 따스하고 부드럽게 손살거리는 모래들이 발가락 사이로 다정하게 파고 들었다. 좋았다. 좋은 김에  앞에 보이는 야트막한 모래 능선을 올라가보자 싶었다. 보이기에는 야트막하니 만만해 보였는데, 정작 걷기 시작하자마자 그것이 무척 힘겨운 높이라는  알았다. 그래도 마음을 먹은 김에 하염없이 걸었다.

모래 언덕의 능선을 따라 보름달 빛이 하얗게 모래 위로 쏟아져 내려왔다. 달빛은 모래에 반 넘어 묻힌 발도 비춰주고 앞으로 걸어갈 능선의 모서리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한번씩 사막 밤 바람이 후루룩 불어올 때마다 모래 능선 위의 모래 한꺼풀이 실크 스카프처럼 얇게 퍼져 날아가곤 했다.

딱 한번에 한걸음씩만 집중해야 겨우 걸을 수 있는 모래 더미를 걸었다. 한참만에 마음 먹었던 야트막한 능선 꼭대기에 얼추 닿았다. 한참 모래 위에 누워 있었다. 등이 좀 따뜻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이유없는 슬픔과 정처없는 그리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무서운 것 같기도 했다. 내 존재는 너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릴없이 모래에 파묻혀 버려도 아무도 나를 찾거나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내가 확인할 것만 같았다. 그 낯선 두려움은 갑자기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변해, 밀려오고 또 밀려왔다. 모래가 파도처럼 한겹씩 날아갈 때마다 내 존재는 그렇게 공중으로 산산히 부셔져 날아가 단 한톨의 자국도 남기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게 파도처럼 날아온 모래는 겹겹의 그리움이 되어 내 마음에 척척 쌓여가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우주 한가운데 달과 모래와 나만 있는 것 같은 순간, 사람들이 너무 그리웠다. 아무나 막 그리웠다. 이 순간은 철천지 원수를 만나도 반가울 것 같은 고독을 맞닥뜨렸을 때, 그 낯선 감정이야 말로 외로움이고 고독이라는 걸 알았다. 45년만에 처음으로 절절하게 느낀 외로움이었다. 조금이라도 거기에 그러고 있다가는 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낮 동안은 호기롭게 이런 말도 했었다.

'내가 사라지는 것은 나에게 오히려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거야, 나는 정작 사라졌으니깐.'

그 말은 말로는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라질까봐'를 느끼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나'였다. 밤은 그렇게 나를 아주 홀랑 벗겨놓곤 한다. 솔직해지는 정도가 내가 허락한 선을 넘는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낮 동안도 충분히 솔직했고 진솔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 동안 부린 아주 작은 허세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다 집어치우라 한다.

주변은 온통 캄캄하고 모래는 계속 날리고.... 이러다 이 밤 안으로 능선 모래가 다 뒤집어져 내가 파묻혀 버릴 것 같은데 또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 낯설고 묵직하게 덮쳐온 감정에 대적이라도 하고 싶은 이상한 반항심에 엉덩이를 모래에 박고 앉아 있었다. 참 이상한 밤이었다. 지독하게 몰아부쳐 속까지 홀랑 다 뒤집어 놓은 시공간 앞에 점점 무력하게 널부러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힘이 빠지고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에 널부러지기 시작하니, 조금씩 고요해졌다. 오기도 반항심도, 내 특기인 뭉개는 것으로 대적하기 등등 갖고 있는 무기를 다 내려놓고 나니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나'라서 참 다행이었다. 그 맥락없는 마음의 움직임이, 일면 매우 이해되는 맥락 안에서 천천히 하나씩 다 느껴졌다.  


달이 꽤 멀리 가는 걸 보고 있다가 천막으로 돌아와 내 잠자리 옆에 잠든 한 아이와, 옆 칸에 누워자는 또 한 아이, 그리고 그 옆에서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편안하게 사지를 늘어 뜨리고 자는 모습을 보고 나서, 온 몸에 구석구석 파고 들어앉은 모래를 털고 또 털어 냈다. 저들이 그냥 있어서 좋다. 뭘 한다 안 한다, 나에게 어떻다, 저런다 이런다.... 그런 생각조차 쓸데없었다. 그런 마음은 참 오랜만이었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다가  문득 구석 청소를 하던 중 발견한 것처럼 마음 한가득 뿌듯이 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제야 깊은 잠에 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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