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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새 May 11. 2020

마음이 먼저 달려 나갔다

 - 이 시국에 갑자기 귀국!

지난주, 어떤 기척이나 귀띔도 없이 갑작스럽게 1달 안에 여기 생활을 정리하고 본사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단다. 봉쇄된 사막 도시의 지루함을 하루 세끼 고민으로 채워가며 행성처럼 정확하게 제 궤도를 돌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날들에 심심한 듯 깃든 평화가 온통 다 깨진 것처럼 마음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우리가 해외에 나와 살기 시작한 뒤로 더욱 솟은 의식주 비용부터, 내 복직, 아이 둘의 편입학 문제가 한꺼번에 혜성처럼 덮쳐왔다. 탄탄하게 자리 잡은 나의 궤도 한가운데를 뚫고 날아와서 정확하게 내 삶의 한가운데를 강타한 혜성은 언제고 올 것이기는 했다. 올 것을 예상했지만 그 시기나 충격에 대한 계산은 허망할 정도로 빗나갔다. 게다가 그 혜성은 나의 멕시코 유카탄 반도인 아이들의 가슴과 생활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이리듐 파편이 튀어 온통 흐릿해진 그때, 백악기의 대기처럼 앞을 볼 수 없어졌다.     

최선의 선택 따위는 언감생심. 중간 복직이니 그저 교육청에서 정해주는 곳으로, 그곳이 어디든 가야 할 처지다. 아이들 역시 내가 복직할 지역의 공립학교에서 제 학년으로 받아주면 그저 감사할 상황이 된 것이다. 변화로 인한 충격이 덜할 곳을 찾아 그나마 어느 정도라도 적응할 수 있게 학교 특징들을 비교해 보고 어쩌고 고를 처지가 아니다. 몸집에 비해 뇌가 작아 살 궁리를 못했던 공룡처럼 허무하게 홀랑 다 죽기야 하겠나 싶지만, 한국에서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두 아이가 겪을 혼란과 8년 동안 늘어진 살들을 추슬러 일하며 집안과 아이들까지 어떻게 챙겨야 하나 생각하니 까마득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 속도가 떨어지고 그 감도 흐릿해지는 걸 어쩔 수 없이 포함한다. 그래서 모험보다는 안정을 찾게 된다. 유동의 불안을 견디기보다는 고정된 지루함을 견디는 편을 택하게 마련이다. 8년 전 한국을 떠나 홍콩에 갔을 때나 3년 전 여기 두바이로 왔을 때보다 내 나라로 돌아간다는데 더 큰 혼란과 불안을 느낀다. 아이들이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사춘기 한복판을 지나고 있거나 이제 막 시작했다는 아이들 성장의 지점이 그렇고, 그 사이 부쩍 늙어버린 중년의 남자와 늘어진 아줌마, 이 극심한 변화를 견디며 살아내야 할 구성원들의 조건이 그다지 싱싱하지 않거나 녹록지 않다.     


학창 시절, 운동회나 체력장마다 꼭 하는 100미터 달리기는 가슴 터지게 긴장되는 종목이었다. 승부욕과 불안이 묘하게 뒤엉켜 온 몸이 저릿할 정도로 차오르고, 출발선에 다른 아이들과 나란히 서서 아득하게 보이는 결승선을 바라보던 때가 생각난다. 차라리 빨리 출발 신호를 듣고 뛰어나가는 게 낫다. 그 출발선에서 느끼는 긴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 찰나가 영원처럼 무겁고 가없었다. 1등을 하고 싶다는 소망과 그러나 내 팔과 다리는 그만한 능력을 절대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그래서 부끄럽기 그지없는 꼴찌나 면하면 다행이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불안 등이 마구 섞여 출발선에서부터 이미 꼿꼿하게 시퍼레져 있곤 했다. 생각이 그쯤에 도달하면, 꼴등은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최악의 상황도 떠오른다.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철푸덕, 땅바닥에 배치기를 해버릴 것 같은 공포가 더럭 하는 것이다.     

1등이고 꼴등이고 아무 생각 없이 운동장에 혼자 털레털레 가서 그저 좀 뛰어볼까 싶을 때는 100미터뿐 아니라, 운동장 한 바퀴도 거뜬하게 잘 달렸다. 기운이 좋아 빠르기도 하고 근성도 있어 제법 오래 뛸 줄도 알았다. 물론 그렇게 뛸 때는 혼자 결승선을 그어 놓을 수도 없거니와 끝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뛰고 싶은 만큼 뛰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보면 경기로 100미터 달리기 할 때 느끼는 그런 아득함 없이 200미터도 가고 400미터도 쉽게 갔다.     


나이를 먹어 기운이 달리면 지혜로 산다고 했던가. 나이가 중년 복판에 들어서고 보니, 기운 대신 와준다는 그 지혜란 것도 그저 나이 먹었다고 절로 생기지는 않더라. 급작스러운 발령 통지 하나에 어린 시절, 긴장으로 온몸이 뻣뻣해진 100미터 출발선에 선 십 대처럼 마음만 허둥거리고 달려 나갔다. 마음만 9초 58의 세계 기록, 우사인 볼트 속도다. 그 마음 주인인 40대 아줌마는 뒤뚱거리며 100미터를 전력으로 35초에 뛰고 헐떡거리고 있는데 말이다. 매해 체중 기록만 경신해서 인생 최고의 체중을 자랑하느라 무릎과 발목 관절은 너덜거리는데 말이다.     

아득하고 겁도 좀 나고 번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번에 우리는 급작스럽게 경기에 투입되었는데, 그나마도 좀 많이 접고 들어가는 느낌이다. 느슨해진 몸과 가벼운 뇌를 간직하고 복직해야 하는 나와 십 대 한복판에서 복잡하기 그지없는 신세계를 맞닥뜨릴 아이들, 그리고 이제 기운과 함께 털도 뭉텅뭉텅 빠져버린 노새같이 애처로운 남편까지 이런저런 허름하고, 자질구레한 삶들이 주렁주렁이다. 시작부터 매우 불리하다.     

이런 객관적인 불리함 위에 내 멘털까지 깨져 나간 상태라면 정말 곤란하다. 이 불리한 시작에서 한 걸음이라도 떼어 내보려면 마음과 내 몸에 달린 발이 속도를 맞출 일이다. 마음이 먼저 달려 나가면 손바닥은 물론 얼굴까지 갈리도록 대차게 넘어지기 십상이다. 내 삶을 누구랑 비교하고, 누구에게 보인다고 부끄러울 일을 걱정하나 싶어 졌다. 전교생이 내 100미터 달리기를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착각만 안 해도 금세 평안하다. 마음이 놓이니 넘어지는 일도 대수랴 싶어 진다. 그새 좀 여유가 생긴다. 그저 그 정도만으로도 별 것 아닌 현실의 내 삶이 어디에서나 가장 소중하게 지켜질 수 있겠다 싶어 진다. 

이렇게 주절주절 적어보는 사이, 먼저 달려 나간 마음을 몸에 데려다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이 시작도 그저 그렇게 그동안 살아온 시간들처럼 그냥 하면 되겠지 싶어 진다. 몸이랑 마음이 꼭 붙어 같이 있기만 해도 시작할 용기가 슬그머니 찬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내가 내 몸과 마음의 속도로 할만한 것들을 할만하게 하면 되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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