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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업보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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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즈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 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김광균의「추일서정(秋日抒情).」치렁치렁한 가을 감정을 걷어내고 말쑥한 유화 한 폭을 보는 듯한 표현으로 가을 정서를 나타냈기에 신선한 느낌이 든다.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이 이 시를 좋아하는 건 이런 신선함 때문일 터이다.


아침에 한시를 읽다 문득 창밖을 보니 뒷집 정원의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무성하던 잎들을 거의 다 떨구고 맨 몸이 되어 스산하게 서있었다. 불현듯 떠오른「추일서정(秋日抒情).」낮으막이 읊조려 보는데 묘하게 방금 전에 읽은 한시 두 편과 뭔가 교감되는 점이 있다.


北風吹白雲 북풍취백운 북풍 흰 구름 몰아가는데

萬里渡河汾 만리도하분 아득한 만리 길 분수(汾河)를 건넌다

心緒逢摇落 심서봉요락 떨어지는 나뭇잎 보는 심정

秋聲不可聞 추성불가문 가을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다


馬嘶白日暮 마시백일모 물 울고 해 저무는데

劍鳴秋氣來 검명추기래 숙살(肅殺)의 가을 되었다

我心渺舞際 아심묘무제 내 마음 갈 길 잃어

河上空徘徊 하상공배회 강가에서 하염없이 배회한다


소정(蘇頲)의「분상경추(汾上驚秋, 분하에서 가을 소리에 놀라)」와 여온((呂溫)의「공로감회(鞏路感懷, 공현 가는 중에)」이다. 「추일서정」은 감정을 배제했지만 그래도 이 시를 크게 이분하면 11행까지가 경치, 이후는 감정을 표현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한시의 전통적 구성 방식인 선경후정(先景後情)을 답습했다고 볼 수 있는 것. 두 한시의 기·승구는 선경에 해당하는데 등장한 소재들은 북풍·흰구름·만리길·말울음·저무는 해·가을 기운 등이다. 이들이「추일서정」에서는 낙엽·길·들·포플라 나무·철책·구름 등으로 전이되었다. 두 한시의 후정 부분은, 이 점이「추일서정」의 정서 부분과 상당히 흡사한 대목인데, 애수에 찬 가을 감정을 절제하여 그림처럼 표현하고 있다. 떨어질 듯 말 듯 애처롭게 매달린 낙엽을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과 강가에서 배회하는 시인의 모습을 그려 나타낸 것. 이런 표현이「추일서정」의 정감 부분에서는 들판을 걸으며 하늘을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견강부회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두 한시를 읽으면서「추일서정」이 이 한시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새로 뽑아낸 작품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어 지탄받을 각오를 하고 주절거려 보았다. 김광균 시인이 이 한시들을 읽어보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고 나아가 이 시를 지을 때 한시를 참고했다는 말 또한 들어본 적 없기에 나의 설명은 억지 그 자체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억지 설명을 해본 건 우리 근현대 문학을 논할 때 으레이 서구 문학사조라는 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 안경을 전통 문학[한문학]이라는 안경으로 바꿔 쓰고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고전은 업보’라는 말이 있다. 업보란 떼려야 뗄 수 없는 굴레라는 의미이다. 현재를 이해하려면 과거를 이해할 수밖에 없고 과거를 이해하자매 고전을 뒤적거릴 수밖에 없다. 고전의 굴레를 벗어버리려 해도 벗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니 고전은 업보랄 수밖에. 근현대 문학이 전통 문학[한문학]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한 것처럼 말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는다. 근현대 문학이 서구의 영향으로 전통 문학[한문학]을 탈피하여 새로운 표현 새로운 감정으로 문학을 일군것은 맞지만 좋든 싫든 근현대 문학은 전통 문학[한문학] 유산을 직간접으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문학을 운위할 때 전통 문학[한문학]을 배제하고 서구문학 사조만을 거론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추일서정」을 쓴 김광균 시인 또한 알게 모르게 한문학[한시]을 접했을 것 같고 그것이 내재돼 있다가 이 시를 쓰는데 발양된 것이 아닐까 한다(꼭 위 두 한시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 시를 서구의 주지주의 이미지즘으로만 보는 건 반쪽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다소 황망한 이런 생각을 굴리면서 다시 창밖 느티나무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맨 몸으로 스산히 서 있지만 이 가을과 뒤이을 겨울을 보내면 다시 새순을 틔우고 울창한 녹음을 풀어낼 터이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땅 밑 저 웅숭깊은 뿌리로부터 길어 올린 수액 덕분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근현대 문학작품을 보는데 전통 문학[한문학]을 배제하고 보는 건 단견(短見)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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