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이 있다. 잇속을 챙겨야 할 때 뒷전으로 나앉고 남을 먼저 세우는 사람. 남이 해를 끼쳐도 “내 탓이려니, 내 팔자려니” 하며 허탈한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사람. 남들이 “용해 빠져서 손해만 본다, 바보 같다” 혀를 차도 그런 말에 얽매이지 않고 우직하게 자기 식대로 사는 사람. 안조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안조에게 나의 평이 어떠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했을까? “잘 봤다”고 할까, 아니면 “잘 못 봤다”고 할까? 아마도 씩 웃으며 “그냥 니 보고 싶은 대로 봐라”하고 말 것 같다.
어제 한 상갓집에서 우연히 안조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안조가 세상을 뜬 지 벌써 3년이 됐다고 했다. 내가 퇴직하던 시점에 그는 이미 세상을 등졌던 것이다. 퇴직 후 한 번 찾아보리라 생각했었는데…. 감정이 메말라 여간해선 눈물이 나오지 않는데, 안조 소식을 접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생전에 안조가 모임 때마다 “우리 선상님 안 왔냐”며 나를 찾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울컥하는 마음에 울음을 토할 뻔했다.
안조와는 초 · 중학교 동창인데, 유난히 친한 건 아니었다. 안조는 조금 어리숙한 듯 굼뜬 구석이 있어 내 놀림감이 되곤 했다. 중학교 1학년 음악 숙제 때, ‘차이코프스키’라고 쓴 걸 보고 내가 “야, 아녀. ‘차이꼽스끼’가 맞는겨” 하고 장난을 쳤다. 안조는 아무 말 없이 지우개로 지우고 ‘차이꼽스끼’라고 고쳐 썼다. 안조는 성인이 된 뒤 나를 부를 때 이름 대신 꼬박꼬박 성 뒤에다 ‘선상님’을 붙여서 불렀다. 자신은 가방끈이 짧고 나는 명색이 선생이니, 친구라도 막 부르기 뭣하고 ‘선생님’이라고 정식으로 부르기도 뭣해 그리 불렀을 것이다. 단순히 농으로 그리 부른다는 느낌은 없었다.
내가 잠시 휴직을 하고 고향에 내려와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어느 날 안조가 뜬금없이 우리 내외를 대천 횟집으로 초대했다. 당시 노총각이던 안조는 사귀는 여자와 함께 왔는데 그 여자는 안조와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안조는 자기 짝지에게 “나도 이런 선생 친구 있다”라고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던 게 아닐었을까 싶다. 훗날 그 여자가 살림 밑천을 들고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마 안조는 술잔이나 기울이며 쓴웃음만 짓고 말았을 것이다. 안조가 우여곡절 끝에 베트남 아가씨와 늦장가를 들던 날, 예식장은 동네 잔치판이었다. 제대 후 마을의 농기계 수리센터에서 일하던 안조에겐 동네 모든 이들이 형이요 아우요 부모였기에 가능했던 일일 터였다. 고향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을 때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며 일을 보는 안조를 보고 “고생 많다”고 했더니 안조가 “고향에 사는 게 죄지, 뭐”하고 답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대학원을 마치고 다시 복직하여 타지로 이사하게 됐을 때 안조는 굳이 와서 이삿짐을 챙겨주고 부임지까지 따라왔었다. 안조는 그런 친구였다.
어떻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걸까? 아등바등 내 몫 챙기며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걸까, 아니면 안조처럼 어울렁더울렁 손해 보며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걸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온통 날을 세우고 사는듯한 세상에서 왠지 안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비록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해도.
다음 주에는 꼭 안조를 보러 가려한다. 너무 늦게 찾아온 나를 보며 안조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어이 선상님, 뭐 하러 왔어~ 바쁠틸디.”
미안타, 안조야, 너무 늦게 가게 됐구나. 용서해 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