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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입향인의 망향 연가

『민원아, 꿩 알 주우러 가자』를 읽고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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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舍幷州已十霜 객사병주이십상 병주에서 나그네 살이 십여 년

日夜歸心憶咸陽 일야귀심억함양 밤낮으로 내 고향 함양을 그리워했네

無端更渡桑乾水 무단갱도상간수 뜻밖에 병주를 떠나 상간하를 다시 건너

却望幷州是故鄕 각망병주시고향 문득 병주를 돌아보니, 아! 저곳이 내 고향이었네


가도(賈島)의 「도상간(渡桑乾, 상간하를 건너며)」이다. 타향에서 오래 살다 보면 그곳이 고향처럼 느껴지는데, 이때의 정서를 일컫는 말로 '병주(幷州) 고향'이라는 말이 있다. 제2의 고향이라는 의미인데, 이 시에서 연유했다. 타향살이가 일반화된 지금, 우리 대부분은 이 병주 고향 신세일 터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병주 고향이 아무리 애틋하다 한들, 태어나 자란 진짜 고향만 할까? 그러나 정작 그 고향을 찾아가 보면 어떻던가? 옛 모습은 오간데 없고 그저 낯선 타향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않던가? 우리가 애타게 그리워하는 고향은 어쩌면 이제 우리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떠나온 이들의 마음이 이렇다면, 고향을 지키며 사는 이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고향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은 감지하겠지만, 출향인에 비해 그 느끼는 정도는 약할 것이다. 하지만 상전벽해된 고향의 모습을 마주한다면 그들에게도 고향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까?


지인 희출 님의 신간 에세이 『민원아, 꿩 알 주우러 가자』는 상전벽해된 옛 천수만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풀어낸 책이다. 책을 받던 날, 첫 대목인 「찰박」을 읽고 나는 잠시 책을 덮은 채 그가 지냈던 당시의 천수만을 그려 보았다. 밀물이 집 가까이까지 차오르던 풍경, 산란을 끝내고 파도에 휩쓸려온 갑오징어[찰박]를 주워 담는 아이의 모습…. 너무나 목가적인 풍경이라 이게 정말 현실이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지금은 방조제 때문에 모두 논밭이 되어버린 이곳이 정말 예전에 희출 님이 말하던 그곳이었단 말인가? 희출 님은 천수만의 예전 모습이 회복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문(序文)에 그것을 간절히 희구하는 마음을 담았다. 그가 간직한 고향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단 한 꼭지를 읽었을 뿐인데도 이런 상념들이 물밀 듯 밀려왔기에 책장을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문득 예전에 대천에 사는 친구에게서 자신의 책 추천 글을 부탁받았던 일이 떠오른다. 당시 나는 시간도 없고 마음도 해이해 친구의 책(『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을 설렁설렁 읽고 어설픈 글을 써주었다. 최근에 우연한 계기로 이 책을 다시 읽고는 많이 부끄러웠다. 그의 이야기는 농부의 하얀 속살처럼 진정성이 넘실대는 깊은 고백이었다. 좀 더 진정성 있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이가 추천 글을 썼어야 했는데, 하는 미안함이 들었다.


이 친구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기록으로나마 그 시절 이야기를 남기고자 글을 쓴 출향인이다. 반면 희출 님은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한 입향인이다. 출향인이 잠시 잠깐 고향을 찾아 변화된 모습에 애틋함을 느끼며 그리움을 노래할 뿐이라면(친구의 글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입향인이 마주하는 상전벽해된 고향을 대하는 마음은 애틋함과 그리움을 넘어선 고통에 가까운 마음일 터이다. 희출 님이 환경운동연합이나 YMCA에 몸담고 사회운동에 투신한 것은 고향에 살면서도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의 고통과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희출 님의 고향은 나의 병주 고향이다. 그의 비원(悲願)이 남다르게 가슴에 와닿는 것도 이 때문이며, 작은 마음이지만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것 또한 그 맥락에 닿아있다. 모쪼록 희출 님의 이번 에세이가 널리 읽혀, 천수만을 되살리고자 하는 그의 비원이 모두가 바라는 가원(可願)으로 이어지는 디딤돌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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