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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윤 Jun 24. 2021

이상한 나라의 구성원

More Than Less 기고

기차를 타고 춘천에 갔다. 영상 촬영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버스 에서 찍어야 할 장면이 있었지만 찍지 못했다. 버스를 빌릴 돈이 없었 으므로. 새벽빛을 담아야 할 씬이 있었고 찍었다. 일찍 일어나기만 하 면 새벽은 우리의 차지이므로. 버스보다 새벽이 더 비싸야 할 것 같은 데도 그랬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옷을 단단히 여미고 떠났다. 어스름한 새벽만 잘 찍히는 곳이면 어디라도 괜찮았다. 가던 차를 아무 곳에나 세워 찍 고, 또 세워 찍었다. 몸은 얼고 정신은 아득하고 안개는 매정할 만큼 차가웠다. 십 분 정도 더 돌아다니다 주차장이 크게 있는 편의점을 발 견했다. 육개장이나 먹고 가자. 친구가 말했다. 

뿌연 습기로 가득 찬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건 밖과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다는 표시였고 그 속은 사우나처럼 푸근했다. 새벽 다섯 시. 여자 셋이서 컵라면 세 개를 사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새벽의 손님 이 반가웠던지 사장님이 깍두기를 주었다. 꽃무늬가 그려진 두꺼운 도 자기 그릇에 알타리무가 최대치로 담겨 있었다. 어머! 사장님 감사해요! 이건 찐 집 깍두기네요. 너무 감사드려요. 반응에 힘입은 사장님은 식당용 철 그릇에 밥도 가득 담아왔다. 

- 아요, 이러다 남는 게 없겠어요. 컵라면보다 이게 더 비싸겠네. 

- 이럴 때도 있어야지. 

사장님은 인심 좋은 대사를 내뱉으며 카운터로 돌아갔다. 호의를 베푼 사람의 위풍당당한 뒷모습이었다. 


라면을 후루룩, 깍두기를 와그작, 맨밥을 퐁당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시내버스가 철철철거리며 들어오더니 주차장에 딱 섰다. 손바닥으로 뿌연 창문을 닦았다. 기사님이 편의점으로 들어오 고 있었다. 우리는 밥숟갈을 뜨려고 숙인 얼굴에, 눈동자만 치켜 올려 눈으로 대화했다. (이런 행운이? 지금이 기회야!) 후다닥 장비를 챙겨 속절없이 접혀있는 버스 문으로 들어갔다. 외로 운 연기, 고독한 연기, 추운 연기, 라면 국물에 밥 말아 먹은 여자가 아닌 연기를 했다. 오 분… 십 분…. 기사님이 생각보다 오래 돌아오지 않은 덕분에 다양한 컷을 찍었다. 창가 자리에서 머리를 기대고 눈물 연기를 하려는데, 맞은편에서 찍고 있던 친구의 어깨너머로 기사님의 얼굴이 솟아났다.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큰일 났다. 

- 아니, 주인도 없는 차에서 뭣들 하는 거요. 

우리는 벨튀(벨 누르고 튀기)를 하는 사람처럼 화들짝 자리를 뜨며 사 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버스 밖으로 뱉어져 나온 나는 말했다. 

- 화날 만하셔.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와 퉁퉁 불은 면발을 삼켰다. 라면 국물에 축축 이 젖은 밥알을 씹었다. 편의점 사장님에게 받은 의외의 호의와 버스 기사님의 당연한 호통을 이렇게 단기간에 겪은 것에 어리둥절해 하면 서. 귀가 먹먹해지는 터널을 지나고 지나 도착한 춘천의 새벽에는 어 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하철에서 큰 비닐봉지에 터질 듯이 무언가를 담아 나왔던 사람이 기억났다. 나는 타려는 줄에 기다리고 있었고 나오는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뭘 봐 시발. 나는 놀라 눈을 피했다. 자리에 앉아  마음을 추스르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욕할 만도 했다. 내 눈빛에는 지 하철에 저런 큰 봉지를 들고 타는 사람은 뭐하는 사람인가, 라는 호기 심과 꾀죄죄한 행색을 바라보는 연민과 남들과 무언가 달랐기 때문에 들었던 불편함이 들어있었다. 그는 그대로 살고 있을 뿐인데. 


예전 친구와의 대화가 기억났다. 

- 두 사람이 길에서 부딪히면 누가 잘못한 건 줄 알아? 

- 앞 안 보고 간사람? 

- 아니, 먼저 사과하는 사람. 

나는 사람들과 부딪히는 세상에 살고 있고 항상 잘못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그냥, 부딪히지 않는 법을 배웠다. 나는 눈빛에 감정을 담기를 조심한다. 누군가를 섣불리 쳐다보기를 참는다. 동시에 무표정을 무기 로 사용하고 말을 걸지 못하게 막고 걸음을 재빠르게 하고 다가오는 사람을 지나친다. 나는 내 것을 지킨다. 그래서 호통은 당연한 것이 되 었고 호의는 뜻밖의 것이 되었다. 문득 나의 뒷모습이 궁금해졌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도 귀가 멍해지는 컴컴한 터널을 지나쳐왔다. 이상한 나라의 구성원, 그게 내 태초의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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