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클공장 노동자 Jan 08. 2022

5. 디자인을 해야 하는데요 의뢰인이 저예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디자인 의뢰였다

나는 디자이너다. 

디자인을 전공하기 위해 입시미술을 했고, 대학에서 시각디자인학과를 전공했으며 지금은 브랜드 패키지 디자인 석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식품회사에서 패키지 디자이너로 근무하는 등 실무 경험도 6년 정도 있다. 이 정도면 디자인 분야의 전문가라고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 


신입으로 근무하던 시절 주어진 업무마다 막막하고 어려워서 경력이 10년쯤 되는 과장님께 '그 경력쯤 되면 디자인이 좀 쉬워지나요?'하고 여쭤본 적이 있었다. 내 질문에 '쉽진 않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이제 알고 있다.'라고 대답하셨던 과장님. 대리급으로 근무하던 나는 이제 그 마음이 뭔지 알고 있던 참이었다. 항상 맘에 쏙 드는 결과물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럴듯한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데는 어려울 게 없었다. 주어진 디자인 업무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피클 공장을 시작하면서 내 제품에 적용할 디자인을 시작하는 것이 너무 어렵고 무서웠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방향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고, 확신이 없으니 작업 과정 내내 흔들리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레퍼런스들 중 내 맘에 드는 것은 또 어찌나 많은지. 이 방향 저 방향 다 가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것이 브랜딩인 것을 알아버린 나는 너무 괴로웠다. 내가 하는 디자인이 고객이 공감해주고 좋아해 줄지 확신이 없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고객들도 눈치챌지 알 수가 없는 것이 어려웠다.


내가 정한 방향에 내가 온전히 책임을 지는 것. 

아마도 그것이 가장 큰 원인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결과물에 대한 피드백이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나를 더욱 혼란하게 했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든 외주 작업이든 디자인은 늘 명확한 클라이언트가 존재했다. 피드백과 함께. 그들이 원하는 방향을 잘 캐치해 작업물에 반영하는 것이 훌륭한 디자이너라고 생각하면서 일했다. 이런 과정이 익숙했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작업물, 내 디자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온전한 나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글을 쓰는 지금 피클 공장을 시작한 지 반년 정도 흘렀고 여전히 내 디자인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렵고 무섭지만, 모든 게 무서웠던 신입이 점점 디자인하는 법을 알아차렸던 것처럼 언젠가 이 일도 익숙해지고 잘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날 성장시켜 줄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하자. 일단 하자.

작가의 이전글 4. 사업자등록증_최종_최종_진짜최종.pdf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