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아니 가족기념일!
(Wedding Anniversary?! No, Family Anniversary!)
5년 전 10월 15일 우리는 뉴욕에 있었다.
상상도 해본 적 없던 뉴욕에서 생각지도 못한 내 생애 두 번째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NYC Wedding 이라니 듣기론 로맨틱할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당시 나와 아이는 영주권을 막 접수한 '비지터' 신분이었는데 교육청에 아이를 등록시키려니 우리의 신분 때문에 안된다고 했다. 내가 사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법에는 '모든 아이들은 부모의 거주비자와 상관없이 학교에 갈 수 있다'로 명시되어 있지만 현실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아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본국에 계시는 남편의 어머니 건강이 악화되어 앞이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8월 말 영주권을 급하게 접수하고 남편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급히 본국으로 떠났고 나는 한 달이 넘는 동안 홀로 교육청과 씨름하고 있었다.
지역 국회의원이 잡아준 교육청 미팅에서 내부 규정에 따라 캐네디언과 결혼한 사람은 비지터 자격이어도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미팅이 끝나자마자 5년 전 땡스 기빙 주말을 이용해 내가 아는 한 지구에서 가장 빨리 혼인 증명서를 발급해 주는 뉴욕 맨해튼 시청으로 향했다.
북미에서 혼인 증명서를 받기 위해서는 정말로 '식'을 올려야 한다. 이를 위해 메리지 라이선스를 먼저 구입, 왜인지 모르지만 발급 후 24시간 동안은 결혼식을 할 수 없다. 만 하루가 지난 후 공인된 결혼감독관 주관에 따라 결혼식을 진행하고 뉴욕 맨해튼 시청의 경우 바로 그 자리에서 혼인 증명서를 발급해 준다.
당시 나의 계획은 이랬다.
일요일 저녁 비행기로 뉴욕으로 넘어가 캐나다 땡스기빙인 월요일에 시청 문 열자마자 바로 라이선스를 발급받아 24시간이 지난 화요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캐나다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야심 찬 계획은 속절없이 무너졌는데, 캐나다와 미국은 땡스기빙 연휴가 달라 단순히 미국은 연휴가 아닌 줄 알았는데 콜럼버스 데이란다.
지금 생각하면 그걸 알지 못했기에 결혼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았던 건데 당시엔 수년간 지속되었던 나의 불안정한 상황 속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번번이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거절하고 있던 남편에게 모든 걸 의지하고, 교육청과 싸우는 것 외에는 다른 경제적 능력이 없는 나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 와중에 남편도 어머니의 생사를 넘나드는 수술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그 주말에 생각지도 못하게 뉴욕에 결혼하러 왔으니 돌이켜보면 심적으로 둘 다 지쳐 있는 상태였다.
바짝 날을 세운 말다툼으로 급기야 아이를 위해 갔던 자연사 박물관에서 남편과 떨어져 관람하기에 이르렀다. (매년 자기 빼고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덤덤을 혼자만 봤다고 남편을 혼내는 건 딸아이의 일종의 결혼기념일 의식이다).
초라함의 극치를 느끼던 나는 남편의 별거 아닌 한 마디에 폭발했다. 어쩐지 그간 참고 있었던 서러움이 물밀 듯 밀려왔다.
지난 3년간 내가 사랑하는 연인이 나를 거절해 온 것의 고단함과 상처들,
나의 두 번째 결혼마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아이를 위한 거라니,
세상에 이렇게 초라한 신부가 다 있을까.
그러나 압박스러운 상황 속 나의 마음을 알리 없는 가뜩이나 예민한 그도 함께 폭발했고 급기야 그의 입장에선 당연한 결혼식 이후 어차피 했어야 하는 '일처리'를 갑자기 강행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니 마지막 나의 자존심도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대망의 화요일 아침, 맨해튼 시청 오픈 시간에 맞춰 라이선스를 구입하고 바로 옆 법원으로 향했다. 원래 규정은 구입 후 24시간 내 결혼할 수 없지만 언제나 예외란 있는 법이다. 24시간 안에 반드시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이유(군입대 등)를 법원에 호소해 면책권을 받으면 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캐나다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점 등을 호소, 다행히 1시간 안에 면책권을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남편이 결혼식 전 일처리를 하고 싶다며 자리를 떠났다. 내 에고와 신부로서의 자존심 등을 생각하면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결혼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내가 주인공이 아닌 결혼식. 12년 전에도 그랬다, 나 외에 모두가 빛나던 나의 첫 번째 결혼식.
호텔방에서 어디론가 사라진 신랑을 기다리며 엄마와 여자 사이의 치열한 갈등은 오랫동안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가뜩이나 팽팽한 상황 속 아이도 힘들어하는데 나는, 나는 어디로 가야만 할까.
여자 권영희의 입장에서는 이 결혼을 열두 번도 엎어야 하는데 엄마로선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나의 구원이 되어준 건 다름 아닌 1년 전 나였다.
함께하자는 나의 제안에 그의 네 번째 거절에, 나는 이 사랑을 포기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포기해야 할 이유는 100가지가 넘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나는 나를 믿고 오롯이 내 사랑이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의 내가 손짓했다.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여기서 포기해도 되. 그렇지만 그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거야?'
어느새 일처리를 끝내고 돌아온 그를 따라 식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는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아이를 위해 또 한 번. 그런 나를 한 번 더 믿고 또 한 번.
상처받았음에도 한 발짝 내딘 나에게 깊이 감사하다. 그 덕분에 이런 행복한 가정을 얻었으니까. 그럴 수 있었던 건 언제나 이 관계의 주인은 나라는 것,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에게 늘 주도권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여전히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중이다. 남편도 나에 대해 다 아는 것 같지 않고 나도 그렇다. 새로운 상황과 조합에서 나는 늘 새로운 그를 만난다. 5년 전 새로운 상황에 낯선 그의 반응에 속아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던 과거의 나에게 고맙다.
나에게 결혼기념일은 행복한 가정이라는 나의 오랜 꿈을 실현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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