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의 힘

병가일기 #18

by 라이팅게일

지난 7월의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감각에 이상 신호가 켜졌다. 감정이 명료하지 않음은 물론 많이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반대로 하루 종일 단식을 해도 배고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보다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분명 덜먹는데 몸무게는 늘었다. 온몸이 부어서 풍선처럼 터질 것 같다. 피곤함도 느껴지지 않았고 불안감도 그다지 못 느끼는데 어쩐지 나의 배경 음악이나 화면에는 그림자처럼 거기 있었다. 어느새 나의 세상은 무뎌진 칼날의 그것처럼 뭉툭해져있었다.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어렴풋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지만 모른척했다. 이는 분명 4개월 전에 먹기 시작한 영양제 때문이리라.


작년 12월 과거의 굵직한 아픔 중 하나를 드디어 도려내고 어머니께 관계의 휴식을 고했다. 용기 내기까지 꽤나 마음고생을 했지만 그에 더해 지난 4년 전 병가를 내기 시작 후부터 줄곧 증상에 시달려 왔으니 온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한바탕 요란한 폭풍이 지나가고 잠잠해질 즈음 이상하게 병가 초기 단계에서나 경험했던 생을 놓고 싶다는 증상이 찾아왔다. (놀라지 마시라, 나는 내 손으로 생을 거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지난 4년간 우울 증세를 지켜보고 경험해 보니 생을 놓고 싶다는 생각도 가슴 두근 거림처럼 우울증 및 공황장애의 수많은 증상들 중에 하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걸 발견했다)


본래 몸의 이상은 마음고생을 일으킨 해당 사건이 종료된 후에 찾아온다. 한창 폭풍이 진행되는 순간에는 숨죽이고 있다가 해결된 후에나 짜잔, 나 여기 있어! 하며 찾아오는 그런 식이다. 이 증상이 오랜만에 찾아왔다는 건 내 몸과 마음 상태가 그만큼 힘드니 돌봐달라는 신호다. 좋아지다가도 한순간에 다시 안 좋아질 수 있다는 걸 여러 번 경험한 나는 문득 정신 건강과 관련한 영양제를 먹어볼까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수천 년부터 쓰였다는 천연 허브 제품을 찾았다. 그렇게 60일만 먹어보기로 했다.


복용한지 수일이 지나자 효과가 나타났다. 당시 나는 하루 중 몇 시간은 꼭 누워서 보냈고 크고 작은 불안 증세 및 브레인 포그를 내내 달고 살았는데 증상이 줄어든 건 물론 갑자기 없던 활기가 돌았다.

내 몸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지! 4년 전 첫 패닉 어택을 경험한 이후 여러 증상에 하루도 시달리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실로 오랜만에 증상으로부터 꿀같은 휴식이 주어졌다.


감정이 예전만큼 명료하지 않고 불면은 심해졌지만 정신과 약의 부작용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사소한 일상도 힘들어하던 내가 이렇게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니 예정보다 복용 기간을 늘렸다.

최고의 세 달을 보내고,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났을 무렵 몸의 이상기류를 감지했다. 이젠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컸기에 복용을 중단했다.


복용을 줄인지 일주일이 채 되기도 전 별안간 기운 없음이 찾아왔다. 몸에 힘이 쫙 빠지더니 서있기조차 힘든 것이다. 마치 우주에서 몇 달을 지내다 지구로 귀환해 오랜만에 중력을 경험하는 우주 비행사가 된 기분이랄까. 묘한 기시감마저 드는 이 현상은 곧 3년 전의 어느 날로 나를 데려갔다.


아침에 눈을 떠 늦은 밤까지 하염없이 침대에만 누워있던 그 시절, 우울증이 극에 달했던 무채색의 나날들.


그런 시간들을 지나 다시 살기로 결심한 후, 그야말로 이 악물고 독하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 매일 울면서 운동하고 나를 재설계해나갔고 영양제를 먹기 전 완벽하진 않아도 매일 일어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일상을 맞이할 수 있었던 건 치열한 노력의 시간들 덕이다.


갑작스런 기억이 떠오르자 곧 나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이대로 누워있다간 그 시절로 또 돌아가 버릴 거야. 안돼. 그것만은 절대 안 돼. 내가 어떤 시간들을 보내고 여기까지 왔는데!!'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음에도 어떻게든 나를 움직여야 했다. 그래, 수영장을 다녀오면 그래도 힘이 날 거야. 억지로 나를 일으켜 가방을 챙겨 차를 몰았다.


어쩐지 그날은 수영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모를 시간은 흘러 어느덧 남편을 데리러 가기 위해 차고에서 차를 후진하려는데 한 쪽 벽면에 가깝게 대었는지 아슬 아슬했다. 결국 차고 입구의 도르래에 걸려 그만 오른쪽 미러가 속절없이 부러지고 말았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지금 뭐하니? 이건 노력이 아니라 끝도 없는 두려움에 그냥 오버한 거잖아.


물론 침대에 누워만 있던 그 시절엔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게 맞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나를 믿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두려움을 연료 삼아 극복이란 이름 하에 강박적으로 노력한 것이다.


오른쪽 미러가 부러지면서 내 안에 어떤 것도 부러진 듯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혹은 유지하기 위해 늘 투쟁 모드로 살았다. 투쟁하는 법만 아는 나는 공황장애로 병가에 들어갔을 때도 이 증상과 싸워 이기려는 생각만 했다.


이날 이후 나는 항복했다. 완전히. 그게 뭐든 내가 져도 된다. 심지어 포로가 되어도 상관없다. 내가 만든 실체 없는 전쟁에서 창을 내려놓고 조용히 걸어 나왔다.


나는 정말인지 승전고를 울리며 세상으로 복귀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증상들, 아니 삶은 투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 삶은 언제나 끊임없는 사건들의 연속이며 그게 뭐든 부드럽게 받아들이고 나를 관통하게 둘뿐이었다. 나는 싸워이겨야만 스스로가 온전해질 것이라 믿었다. 나는 증상을 아니, 삶 전체를 그간 철저히 오해하고 있었다!


싸움을 멈추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승리를 거머쥐어야만 맞이할 수 있을 줄 알았던 눈부신 황금 들판이 펼쳐졌다. 그간 눈앞에 싸움에 몰두하느라 몰랐을 뿐 나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여전한 상황 속 내 인생에 처음으로 맞는 황금 들녘을 거니는 중이다. 돌이켜 보면 아름답지 않은 날들이 없었다.


내 볼을 스치는 한 줄기 바람이 반갑다.


#SickLeaveDiary #라이팅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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