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어른이 되고 있는가.
바람이 선선하고 하늘이 높아진 가을. 이때가 되면 각 단체에서는 체육대회를 한다. 나도 어김없이 참여를 했다. 일요일 이른 낮이 피곤할 만도 한데 모일 때는 풀린 눈을 하고 운동장에 걸어 들어오던 사람들이 경기가 진행될 때마다 눈이 반짝이고 승부욕에 불타오른다. 나도 비실비실 관중석에 앉아 있다가 릴레이 경기에 참여했다. 그러다 상대편이 빠르게 달려와서 자기 팀 계주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것을 보고는 급기야 흥분을 하고 말았다. 내가 맡은 것은 뒤로 달리기였는데 뒤로 빠르게 뛰어가다가 결국 뒤로 날라서 자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왼쪽 팔목 뼈에 금이 가는 골절상을 입히고 깁스를 해야 하는 사태를 만들고 말았다.
그렇다. 나는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마흔에, 승부욕에 마음이 몹시 흔들려서 솟구치는 자신감으로 달리다 자빠지고 말았다. 코로나19가 뭔지도 몰랐던 작년 10월의 이야기다.
(위의 글의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곳으로 - http://ch.yes24.com/Article/View/40720)
무심코 다친 손으로 무거운 것을 드는 날은 아직까지도 미세하게 통증이 느껴진다. 아마도 평생 함께 할 것 같은 지병을 마흔에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몸이 예전 같지 않은 사십 대에 들어온 나의 정신은 어떠한가? 아직도 어른이 되어가는 중인 것 같은 나는 어떻게 나이 들어가고 있는 걸까?
마흔 즈음부터 중용. 과유불급이란 단어를 자주 생각하곤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요즘 나의 화두는 ‘절제’다. 행동의 절제, 말의 절제, 마음의 절제. 모든 것에 절제가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행동의 절제
승부욕을 과하게 부리다 내 인생 처음 뼈에 금이 간 그때부터, 행동을 절제하라는 이성의 명령은 중요해졌다. 체력도 뼈도 예전 같지 않다. 생각만큼 몸이 잘 따라주지도 않는데, 다쳐도 생각만큼 빠르게 회복되지도 않는다. 이제 몸을 쓰는 일을 과하게 하면 다친다는 생각은 조금 슬프다.
- 말의 절제
이것은 글을 퇴고하며 느끼게 된 것인데, 하고 싶은 말을 와르르 백지에 쏟아내고 줄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특히 에세이 공모전에 글을 내기 위해 작성한 초안 A4 2장을 작품 분량인 A4 1장으로 줄이는 일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글을 쓰고 퇴고를 하며 새삼 깨달았던 것은 글은 지우고 퇴고할 수 있으니 다행인데, 말은 해놓고 다시 주워 담기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다.
말이 많아지면 실수가 생기기 마련이고 본의 아니게 상대에게 불편한 감정을 유발할 수 있다. 나의 괜한 말이 상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상대의 경험 기반으로 재해석됐을 때 전혀 다른 해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경험한다. 그리고 때때로 오해가 되는 건 불편한 일이다. 의도치 않은 말의 실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대의 재해석을 마주하는 것이 피로할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가능한 천천히, 적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이가 많아질수록 경청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더 하게 되는 것을 나에게서도, 상대에게서도 느낀다.
그래서 연초부터 ‘말을 절제하자.’는 생각을 호기롭게 가졌는데, 공교롭게 코로나가 찾아와서 어쩔 수 없이 말이 줄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과도한 자발적 은둔생활로 겨울 같은 봄을 지냈다. 카페에서 주문 관련 말고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여름 즈음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 긴 대화를 하니 어색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말의 총량이 작년 대비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결심한 것을 이루게 되었다.
- 마음의 절제
3월 초만 해도 코로나가 이렇게까지 길게 갈지 몰랐는데, 길어지면서 나의 마음도 왔다 갔다 예민해지곤 했다. 괜찮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텅 빈 느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무력감. 마음의 무너짐. 이런저런 많은 상념 속에 봄이 지났다. 그리고 '여름이 오긴 오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던 초여름의 아침. 무언가를 인정하는 그때부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절제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행동이든 말이든 모든 것은 마음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상황이 요동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넘실대는 것을 어떻게 절제하냐는 것이 관건이다.
안달복달, 전전긍긍, 아등바등하는 감정이 이제는 괜스레 부담스럽다.
요즘 나는 어떤 상황에서 마음의 동요를 느끼면 ‘이 순간만 지나가면 괜찮다’ 하며 생각을 잠시 멈춘다. 마음의 동요는 외부의 어떤 대상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고, 나의 내면에서부터 갑자기 시작될 수도 있다. 그 상황에서 내가 무언가 하고 싶고 표출하고 싶지만 잠시 멈추고, 그때만 지나고 나면 마음은 사그라진다. 조급한 마음이 생기거나 이성보다 감정이 앞설 때 특효약이다.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후회가 동반될 수 있으니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절제. 어떤 상황에서 극한 마음으로 치 닿지 않는 초연함. 그리고 ‘모든 것은 다 지나갈 것이다’는 명제. 애써서 고단했던 시간의 바깥에 서보니 될 것이 안 되고, 안 될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 그러니 마음을 절제하고 지켜서 나에게 무엇이 편안하고 행복한 방향인지만 생각할 것. 따뜻했던 봄날도, 뜨거웠던 여름도 다 가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추운 겨울도 결국에는 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예전보다 빨라진다. 마음의 동요가 생기면 빠르게 흘려보낼 수 있다. 넘실대는 감정을 흘려보내고 할 수 있는 다른 것에 에너지를 쏟는 것이 평정심을 찾고 나의 에너지를 잘 분배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빠르게 인정하되 쉽게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은 경계한다. 언제나 희망을 생각하여야 한다. 봄날도 여름도 결국 다시 돌아온다.
행동. 말. 마음의 절제를 해나간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지키겠다는 말이다. 이것이 자칫 모든 것에 방어적인 태도가 될 수도 있으니 이것도 경계한다. 모든 일에 덤덤하고 냉정하기보다, 따뜻하고 초연한 40대 사람이 되고 싶다.
죽을 때까지 절제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꿈꾸고 시도하는 것이다.
‘설레임’ 을 냉장고에 넣어두지 않고 마음에 가지고 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