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과 형제들이 되고 싶었던 어부는 첫 번째 어부들이었고,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바랐던 어부는 두 번째 어부들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세 번째 어부들이다.
벤자민과 그의 가족이 겪는 비극이 지나치게 무겁고 끈적끈적해서 마치 히폴리토스와 파이드라 혹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처럼 신화 속 일화를 읽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아불루의 악담이 예언이 되어 힘을 가지고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 요루바어, 이보어를 소리 나는 대로 지면에 옮겨 아프리카의 토속적, 주술적 느낌이 더욱 강화되는 듯했다.
작가는 시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비극적 서사임에도 이야기가 아름답다. 몰아치는 스토리텔링 속에서도 나이지리아의 정치적, 환경적 배경의 묘사가 구체적이고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있다. 책을 모두 읽고 난 후에는 마치 아프리카의 건조한 모래가 입에 들어온 듯, 강가에서 썩어가는 망고의 냄새가 몸에 밴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벤자민은 형 이켄나, 보자, 오벰베와 함께 오미알라 강에서 낚시를 하곤 했다. 그 강은 ‘부정한 물’로 알려져 인적이 드문 곳으로 어린 벤자민의 형제들도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어부’라고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 몰래 물고기를 잡고 집에 돌아오던 어느 날 그들은 아불루 라는 미치광이를 만나고 그의 입에서 “이켄나는 어부들로부터 죽임을 당한다”라는 악담을 듣게 된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아불루의 악담을 ‘예언’이라고 믿는다는 점이었다. 이켄나 역시 아불루의 말에 매몰되어 점차 두려움에 잠식되어 가며 벤자민의 가족은 서서히 비극을 맞이한다.
두려움에 눈이 멀어 형제를 멀리하는 이켄나에게 점차 분노를 쌓아가던 보자는 몸싸움 끝에 그를 죽이고 자살한다. 3살 데이비드, 젖먹이 은켐을 뒤로하고 어머니는 슬픔에 정신과 몸을 빼앗긴다. 욜라로 전근 갔던 아버지는 사표를 내고 아쿠레로 돌아와 가족을 재건설하기 위해 힘쓰지만 오벰베는 벤자민에게 형들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둘은 함께 아불루를 살해한다. 오벰베는 마을을 떠나 도망치고, 벤자민은 법정에 선다.
소설 전반에는 비극의 정서가 묻어 있다. 벤자민의 가족이 겪는 슬픔 이외에도, 배경이 되는 나이지리아 사회도 참혹하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쿠데타가 빈번한 시대였다. 초등학생의 나이에 반란군을 피해, 살기 위해서 자동차를 운전해서 도망쳐야 했다. 경찰은 무능하고 게을러 아불루가 살해당한 여성의 시체를 강간하도록 내버려 둔다. 조금이라도 배운 자들은 서구 사회만이 희망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비극 속에서 작가는 가족의 사랑으로 희망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극단적인 비극 앞에 무너진 아내를 일으켜 세우고, 갈가리 찢긴 가족을 다시 봉합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켄나가 변화하는 동안 자신의 부재를 회개라도 하는 듯 다시 한번 모든 가족을 자신의 울타리 안에 넣고 감싸고자 한다. 8년의 감옥 생활 후 벤자민이 돌아올 집이 있었다. 집에는 부모님이 계셨고, 상처 받지 않은 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오벰베도 돌아온다.
아불루는 정말 선지자였을까?
아불루는 불의의 사고로 뇌를 다친 후 자신의 어머니를 강간하고, 20대 여성의 시체를 시간 한다. 집도 없이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 먹으며 살아간다. 그는 미치광이이지 예언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예언자로 만든 것일까? 나는 그것이 ‘언어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막연한 것을 언어로 규정하면, 보이지 않던 것을 실체를 갖게 되고, 이로 인해 믿음과 행동의 동기가 생긴다.
지금의 나는 사람들이 뭔가를 믿으면 그것이 종종 영구적인 존재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구적인 존재로 변한 것들은 파괴할 수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아불루는 “이켄나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그의 미래를 규정했다. 이켄나에게 보이지 않던 미래는 아불루의 악담을 통해 손으로 잡힐 만큼 생생해졌다. 이켄나의 내면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형제들을 외면하고 외톨이로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오벰베는 “형들은 아불루의 예언 때문에 죽었다”라고 정의 내린다. 그 순간 이켄나와 보자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분노로 바뀌고, 그들의 죽음에 뚜렷한 가해자의 실체가 드러났다. 오벰베는 직접 아불루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아불루를 살해한 후 오벰베는 도망치고, 벤자민은 법정에 선다. 벤자민에게 아버지는 “네가 한 일은 훌륭한 일”이라고 규정해준다. 벤은 아버지의 말을 통해 두려움과 혼돈 속에서 빠져나오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8년의 세월을 살아남는다.
작가 치고지에 오비오마는 벤자민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며, 이 “규정의 힘”을 보여준다. 매 챕터의 첫 문장은 ‘우리는 어부들이었다’, ‘아버지는 독수리였다’, ‘거미들은 슬픔의 동물이었다’. ‘증오는 거머리다’와 같이 개념을 정의 내리는 은유로 시작한다. 작가가 이렇게 정의를 내린 순간 우리는 책 속에 등장하는 모든 거미는 슬픔의 상징으로, 증오는 인간에게 달라붙어 그의 영혼까지 빨아먹는 존재로, 아버지는 하늘 높이에서 가족을 살피는 존재로, 벤자민과 형제들은 어부로 받아들이게 된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글의 형식이 일치하는 것이 흥미롭다.
이쯤에서 ‘나’를 떠올려 본다.
‘나’는 ‘나’를 무엇이라 규정짓는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의 직업인데, 슬프게도 나는 나의 직업을 별로 사랑하지 않아 직업으로 내가 정의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가족 안에서 부여되는 타이틀, ‘누구누구의 엄마, 누구누구의 아내, 누구누구의 딸’은 따스한 직책이지만 규정된 이름에 따라 기대되는 나의 모습도 다르기에 나의 본질을 정의 내린 것이라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타인에 의해 규정된 ‘나’ 아닌가.
나의 고민은 요즘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고민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스스로의 모습을 궁금해하고, 그걸 언어로써 명확하게 규정 내릴 수 있는 통찰력과 용기를 지닌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삶 속에서 무엇을 끌어올리는 어부일까?
<어부들>의 운명론적 이야기에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 영화가 떠올랐다. <킬링 디어>도 한 소년의 마치 '신탁'과도 같은 악담으로 한 가족의 비극이 시작된다. 이 영화에서도 아버지는 가장으로써 책임감을 지니고 선택을 하는데, 나약한 인간의 몸부림이 잘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