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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un 09. 2022

이제 때가 되었다.

스티븐 킹 예찬.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아빠가 사뭇 들뜬 표정으로 ‘이제 때가 되었다’며 책을 선물하셨다. 이전까지 나에게 가장 스릴 넘쳤던 책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 가장 잔인하게 느껴졌던 책은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 가장 무서웠던 책은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이었다. 책에서 만난 가장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은 허먼 멜빌의 <모비딕> 속 에이합 선장이었고, 가장 소름 끼쳤던 세계는 조지 오웰의 <1984> 속 빅브라더의 통제에 놓인 세상이었다. 보통 이런 책들은 표지에 작가의 얼굴이나 작품 분위기에 어울리는 명화가 실려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건넨 책의 표지는 내가 익숙하게 읽어오던 책들과는 달랐다. 심상찮았다. 검은 바탕에 꾹꾹 눌러쓴 듯 두꺼운 빨간색 폰트로는 “STEPHEN KING”이라고, 괴물의 이빨로 갈가리 찢긴 캔버스를 연상시키는 하얀색 글씨체로는 “THE SHINING”이라고 적혀있었다. 나에게 이 책은 인간의 광기를 폭발시키는 ‘귀신 들린 호텔’이라는 끔찍한 세상을 배경으로, 도끼를 들고 날뛰는 사이코가 등장하는, 가장 스릴 있고,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소설이 되었다.


 <샤이닝>에 이어서 읽은 책은 <캐리>였다. 가족을 죽이려는 아버지에 이어 돼지 피를 뒤집어쓴 내 또래 여학생의 이야기가 연신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미저리>를 읽고, 몇 년을 고대하다 수능이 끝난 다음날 영화도 봤다. <안나 카레리나>보다 더 두꺼운 <그것>도 읽었다. 너무 빠져들어 실제로 좀처럼 볼 기회도 없는 피에로를 무서워하기 시작했고, 약 15년이 지난 후 넷플릭스 화제작 “기묘한 이야기”를 보면서도 <그것>을 떠올렸다. 스티븐 킹은 호러 문학의 거장이라고 정의를 내릴 때쯤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읽었다. “뭐라고? 나 참! 남자들은 가끔 정말 멍청하단 말이야. 자네나 잔소리 그만두고 내 말 좀 들어봐.”라고 시작하여 끝까지 남편을 죽인 여자, 돌로레스의 목소리만으로 진행되는 소설은 <제인 에어>보다 훨씬 여성주의적이라는 생각을 그때도, 지금도 하고 있다. 스티븐 킹의 단편집들을 읽으면서는 무려 학교 수업시간에 친구, 선생님과 함께 봤던 영화 “그린 마일”과 “쇼생크 탈출”의 원작이 그의 소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티븐 킹은 단순한 호러 작가가 아니구나! 아빠가 왜 나에게 그토록 스티븐 킹을 소개해 주고 싶어 애타게 ‘때를 기다려’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따고 바닷속에서 호흡하던 첫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우주로 나가 달에 직접 발을 내딛어야만 알 수 있을 감정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바다에 대한 상상이 경험으로 바뀔 것이라 짐작했는데, 상상의 차원을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렸다. 스티븐 킹은 ‘독서의 세계’ 속 모래밭에 앉아 햇볕만 쬐던 나의 멱살을 틀어쥐고 해저로 순식간에 끌고 들어갔다. 허세스럽게도 세계문학만 읽던 내가 장르문학에 눈을 떴다. 나의 상상력 최대치를 뛰어넘어, 괴물, 귀신, 정신이상자, 외계인, 말하는 쥐, 걸어 다니는 시체가 등장하는 소설도 위대할 수 있었다. 다른 차원의 생명체가 지구로 넘어오며 안개를 만들어 내는 세상(<미스트>), 갑자기 하늘에서 돔이 떨어져 고립된 세상(<언더 더 돔>)속에서 극한에 내몰린 인물들은 본성을 드러냈다. 생존 의지만 남아 동물과 다름없는 모습부터 아비규환 속에서도 존엄성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하는 모습까지. 카뮈의 <페스트> 속 리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스네기료프,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속 커츠가 모두 스티븐 킹 소설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샤이닝>은 ‘초자연적 힘을 가지고 있는 호텔 때문에 점차 미쳐가는 소설가 잭이 도끼로 아들과 아내를 죽이려 하는’ 내용이다. ‘초자연적 호텔’이라니. 문장으로 보면 B급의 이야기를 스티븐 킹은 놀랍도록 설득력 있게 풀어나간다. 아빠는 이런 스티븐 킹을 수식하기 위해 ‘천재’, ‘명작’, ‘클래식’, ‘전설’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셨다. 그래서 사실 처음에는 스티븐 킹이 톨스토이나 제임스 조이스처럼 이미 죽은 사람인 줄 알았다. 명작에 대한 편협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제 ‘명작이란 자녀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작품’이라는 새로운 정의를 내려 본다. 나도 나의 아이에게 때가 되면 스티븐 킹을 선물하고 싶다. 다만 <샤이닝>을 읽고는 한동안 밤에 화장실 욕조를 쳐다보지 못했던 기억이 있으니, 퇴직한 형사 빌 호지스가 살인범을 쫓는 ‘평범한’ 내용인 스티븐 킹 식 추리소설 <미스터 메르세데스>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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