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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ul 19. 2023

나는 술이 좋다

게로, 쇼도지마 그리고 오아후

 10년 전 일본 게로시를 방문했다. 1930년대에 지어진, 유형문화재이자 일본 왕족들이 사용했다는 유서 깊은 유노시마칸에 묵기 위해서였다. 온천이 퐁퐁 솟아나는 산에는 운치 있는 료칸들이 밀집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 우리의 목적지였다. 입구부터 당장이라도 치히로와 하쿠(‘센과 치히로’의 주인공들)가 뛰쳐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미로 같은 건물을 구석구석 구경하고, 지겨울 만큼 온천욕을 즐긴 다음날, 거북이 씨와 마을을 구경하다 편의점에서 이 지역에서만 나온다는 온천수로 만든 맥주를 발견했다. 오전 10시라는 시간에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구매해 마셨다. 와우! 이 맥주를 전 세계로 수출하면 일본이 다시 세계 제2강 대국으로 급부상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맛있었다. 편의점에서 각자 한 병씩 해치우고 새로운 병을 사서 나왔다. 때는 성급한 매화꽃이 필 만큼 비정상적으로 따뜻한 1월이었지만, 그래도 차가운 맥주를 들고 다니기에는 손이 너무 시렸다. 그리고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맥주를 들고 걷자니, 왠지 우리가 한국인의 이미지를 왜곡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거북이 씨의 배낭에서 카모플라쥬에 적격인 국방색 양말을 찾아내서 맥주병에 씌웠다. 게로 구석구석을 양말 맥주와 함께 했다. 나는 이렇게 술을 좋아한다.


 술에 대해서 확신에 찬 취향을 가지고 있다. 와인은 드라이하고 바디감이 무거운 레드와인. 반드시 오크향과 낙엽, 나무 냄새가 풍성해야 한다. 반면 맥주는 산미가 있고, 꽃과 과일향이 퍼지는 것을 선호한다. 향이 진하고 도수가 높은 술로는 언제나 테킬라를 선택한다. 안주 없이, 파트너 없이 마셔도 그 자체로 온전함을 줄 수 있게 맛있는 술을 즐긴다. 취하는 건 싫고, 술 마시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해방감이 좋다. 이를테면 야자감독 후 집에 돌아와 밤 11시에 이불속에서 마시는 맥주가 주는 일탈감. 내일 또다시 6시부터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며 지금 마신 술을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마시는 그 쾌감이 좋다. 술을 마실 때는, 원래의 꽉 막힌 나–사소한 것도 계획을 세우고, 매일 투두리스트를 작성하고, 새로운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10분 단위로 쪼개어 미리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내가 아닌 나의 모습’이라 마음에 든다. 그렇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낮술. 주위가 환하고, 할 일이 쌓여있고, 하루가 절반이 남았는데도 마시는 술은 그 무엇보다 나답기를 거부한 내 모습이기에, 그 짧은 순간 나를 답답한 나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지와 하늘 높이 태양이 떠 있는 시간에 마시는 술은 그래서 아주 ‘케미 폭발’이다. 하와이를 갈 때마다 쇼핑과 자연을 모두 포기할 수 없는 거북이 씨와 나는 오아후 섬에 길게 머무는데, 그 기간 동안 알로하 타워 근처의 수제 맥주집을 자주 찾는다. 특히 두 번째 하와이 여행부터 하와이의 ‘따릉이’라 할 수 있는 비키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덕분에 기동력을 얻은 우리는 그 해부터는 맥주집을 정말 숙소만큼 자주 방문했다. 웨이터가 이곳으로 이사했냐고 물을 만큼 큰 금액의 기프트 카드를 사서 알차게 썼다. 알라모아나에서 쇼핑을 하거나 다운타운 지역을 구경하고, 미술관을 들른 후 언제나 알로하 타워의 맥주집에서 4시간가량을 보냈다. 그러면 어느새 하늘 높이 떠 있던 태양이 항구의 지평선에 가까워졌다. 늘 야외 테이블을 선호했던 우리는 시력을 잃을 것만 같은 위기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빨간 태양을 마주한 채 맥주를 마셨다. 우리를 좋아하게 된 서버가 다가와 자리를 옮겨줄지 물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선글라스를 쓰고 선탠을 하며. 한국에서의 나는 한심하게 여길, 얼굴을 까맣게 태우며,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은 채 ‘시간을 죽이는’ 짓을 히비스커스 꽃과 블루베리를 넣어 만들었다는 B-sour라는 맥주와 함께라면 영원토록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여름 쇼도지마에 갔을 때 마셨던 맥주는 한국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기린이찌방 병맥주였다. 올리브가 자랄 만큼 뜨거운 쇼도지마 지역의 바다에서 한참을 놀았기에, 흔한 맥주도 냉동 닭고기를 튀겼을 게 뻔한 카라아게도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만큼 맛있었다. 위장에서 위치추적이 되도록 차가운 맥주를 평상에서 금세 두 병이나 마시고 음식점에 딸린 샤워시설을 이용했다. 키가 작은 샤워부스는 놀랍게도 천장이 없었다. 거북이 씨는 그 안에서 까치발을 들면 무려 인중이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낮술로 해방된 나는 나답지 않게 거침없이 샤워부스로 들어가 소금물에 절여진 수영복을 벗었다. 온몸으로 비를 맞는다는 착각 속에서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햇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물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낙하하는 물을 바라보니 꼭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손바닥만 한 샤워부스 안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다니. ‘나’에서 해방된 ‘나답지 않은 나’는 ‘나다운 나’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그래서 나는 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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