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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솔 Feb 27. 2022

[영화리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사그라들지 않는 마음에 대하여


가이드를 시작하며

 불씨가 붙은 모든 것들은 달아오르는 불꽃에 휩싸이며 더 큰 불꽃을 피우는 데 일조하게 된다. 그렇게 한참을 타오르면 모든 것이 재가 되어 흩날린다. 곧이어 우리 곁에 남는 것은 눈자위를 붉게 만드는 새까만 연기와 곧이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오프닝에 등장하는 어느 회화 작품의 제목이다. 작품의 제목을 읊조리는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의 표정은 그리움으로 젖어있다. 극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그 작품이 마리안느가 목격한 어느 마법 같은 순간의 엘로이즈(아델 에넬)를 묘사한 것임을 알게 된다. 필자가 작년에 감상한 최고의 영화로 꼽은, 셀린 시아마의 2020년 개봉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톺아보자.


바로 이 장면이다. 마리안느가 멍하니 엘로이즈의 모습을 바라본.






시작과 끝

 영화는 마리안느의 회화 수업 씬으로 운을 뗀다. 수강생들의 손과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때로는 백지가, 때로는 백지 위로 얄팍하게 그어지는 한 줄의 선이 보인다. 반원 형태로 둘러앉은 그녀들의 중심에는 모델로 자리한 마리안느가 있다. 초상화를 그리는 법에 대해 코치하던 그녀는 이내 시야에 들어온 것을 보고 설명을 멈춘다. 어느 수강생이 꺼내놓은 회화, 그것이 그녀의 눈빛을 흔든다. 수강생이 그녀에게 제목을 묻자,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린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그렇게 마리안느의 그리움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두 사람의 첫 만남으로 거슬러 가게 된다.

 한편, 영화의 엔딩 시퀀스는 두 사람의 재회 아닌 재회로 짜여있다. 서로 마주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재회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느끼기에 재회 아닌 재회다. 주된 매체는 회화와 음악이다. 회화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다음 파트 '모티프'에서 다루겠다.

 엔딩 시퀀스의 대미를 장식하는 씬은 어느 연주회를 찾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로 장식된다. 두 사람이 동행한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기 위해서 왔음은 분명하다. 마리안느는 수많은 관객 속에서 엘로이즈를 바쁜 눈길로 찾았고, 결국에는 찾아내었다. 그렇게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만났다. 반면 엘로이즈는 단 한 번도 객석으로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엘로이즈는 음악을 통하여- 마리안느가 낡은 피아노를 서툴게 뚱땅거리며 들려준 그 음악을 통하여 그녀를 만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 음악회에서 서로를 마주 보지 않은 채 재회할 수 있다. 음악이 절정으로 향할수록 엘로이즈의 몸은 들썩인다. 처음에는 그리움과 슬픔이 짙게 드리우지만, 아주 느린 속도로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아주 미세한 미소가 피어난다. 엘로이즈의 표정에 피어나는 수만의 감정들을 오래도록 보여주는 마지막 씬은, 배우의 탁월한 연기와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본 영화의 백미다.



모티프

 모티프는 쉽게 말해 '반복'되는 것들이다. 동일성의 반복도 있지만, 보통 영화에서는 차이의 반복을 활용한다. 전체적으로는 유사하지만 주의 깊은 관객이라면 알아차릴 수 있는 차이를 부여해 모티프 간 변주를 주는 것이다. 본 영화에서는 네 가지 모티프-꽃, 오르페우스 서브텍스트, 불, 바다-가 기억에 남는다. 그중 꽃과 서브텍스트를 다루어본다.

 꽃은 자수와 생화가 한 폭에 담긴 컷으로 두 번 반복된다. 꽃 자수는 엘로이즈 가문의 어린 가정부 소피(루아나 바야미)가 놓는데, 처음 등장할 때는 부실한 줄기를 피워내고 있고, 곁에 놓인 생화는 싱그럽게 피어있다. 이후 극 후반에서 꽃 자수는 만개했지만 생화는 시든 채다.

 자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자 그대로 인위적인 문양이다. 자수로 새긴 꽃은 진짜가 아니다. 겉으로 보기 좋게 꾸며진 형상일 뿐,  그 어떤 향도 뿜을 수 없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사랑을 키워갈 때 [싱그러운 생화 + 이제 막 새겨지기 시작한 앙상한 자수] 컷을 삽입한 것은 분명 두 사람의 참된 마음을 아름다운 생화로서 상징하는 의도적인 컷이다. 이후 두 사람의 이별이 다가올 때, 즉 엘로이즈가 부모에 의하여 강제 결혼을 해야 할 때가 다가오면서 참된 마음은 병약해지고 인위적인 만개를 맞이하게 된다. 다 완성된 꽃 자수는 마냥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꽃 자수는 부모가 엘로이즈에게 맺어준 인위적인 연을 상징하기에 더욱 그렇다.

 두 번째로 살펴볼 모티프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라는 서브텍스트다. 서브텍스트가 이야기를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서브텍스트의 성격에 따라 그 효과는 다를 텐데, 본 영화에서는 기존 에피소드 해석과는 다른 견해를 주고받으면서 이야기에 철학적 깊이를 더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마리안느와 소피는 오르페우스의 이기성을 지적했지만 엘로이즈는 오르페우스를 뒤따라가는 인물인 에우리디케에게 자발성을 부여함으로써 상황을 새롭게 해석한다. 결국 이 서브텍스트가 '이별의 자발성'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떠안게 되면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처하는 상황에도 비극성을 더한다.


서로에게 이별을 고하는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


 이별 후,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나누었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반영하여 두 인물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 본 채 서로가 고하는 이별'로 묘사한다. 그 회화를, 언젠가 엘로이즈가 보게 된다면 떠올려줄 것이다. 마리안느와 함께 했던 그 뜨거운 순간을. 결국에는 마주 본 채 짧게 이별을 고한 자기네들의 순간을. 그렇게 이들은 음악으로, 회화로 재회할 것이다.



인물들의 관계

 핵심 인물은 4명의 여성이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소피, 그리고 엘로이즈의 어머니이자 백작 부인(발레리아 골리노). 이들의 관계 맺음을 살펴보자. 영화는 이러저러한 성격의 인물들이 만나 그 성격과 주어진 상황 탓에 필연적으로 그렇게 행동하고- 관계를 맺는 것이니 말이다(영화의 개연성은 마치 필연성처럼 촘촘히 설계되어 자연스레 납득되어야 한다).


-두 사랑;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백작부인이 마리안느를 집으로 불러들이며 그녀에게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과업을 부여한다. 심지어 엘로이즈가 초상화 모델을 서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에 마리안느는 엘로이즈 모르게 그녀를 관찰하고, 기억한 뒤, 그려야 한다. 마리안느는 산책 친구라는 거짓된 이름으로 엘로이즈의 삶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후 그 관계는 마리안느가 철저히 비밀을 감추는 속에 무탈히 진행된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하고자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고, 엘로이즈는 그 속내를 모르니 마리안느에게 빠져든다. 때로는 엘로이즈가 대범하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때도 있다. 그러다 진실이 드러나고, 잠깐의 멀어짐은 서로의 존재를 더욱 소중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 관계를 단단하게 만든다.

 두 사람의 관계를 사랑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렇게 진심을 꾹 눌러 담은 사랑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두 사람이 사랑을 키워가는 순간들도 아름답지만, 단 몇 초, 찰나의 순간으로 표현된 이별이 가장 인상적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마친 뒤 백작부인의 요청에 따라 섬을 떠나는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꽉 끌어안고픈 마음을 담아 백작부인을 힘껏 안고, 엘로이즈는 가볍게 안은 채 목덜미에 제 코를 찰나 파묻고 빠르게 성을 벗어난다. 그 몇 초가 그리도 절절할 수 있을까.

 또한, 화가인 마리안느의 지휘 아래 포즈를 취하는 엘로이즈가 전형적인 [예술가와 피사체] 관계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시선의 주체로서 피사체에 전권을 행사한다고 볼 수 있는 예술가, 그리고 응시의 대상으로서 그 속내까지 한없이 발가벗겨진 듯 객체화되는 피사체- 이 관계가 엘로이즈의 말 한마디로 깨지는 것이다.


예술가와 피사체



-세 여자; 마리안느, 엘로이즈, 소피

 백작부인이 마리안느에게 반드시 그림을 완성하라는 말을 남기고 섬 밖으로 나간 며칠 동안은 세 여자의 평등한 세상이 펼쳐진다. 마리안느는 와인을 준비하고, 엘로이즈는 서툰 칼질로 빵을 썰고, 소피는 자수를 놓는다. 늘 소피의 몫이었던 식사 준비가 집주인 엘로이즈와 손님 마리안느에 의해 행해지는 그림은 낯선 평화로움을 풍긴다. 가부장제를 답습하며 엘로이즈에게 혼인을 강요하는 백작부인이 없는 뒤에야 가능해진 평등 때문에 가능한 평화 말이다.


평등한 세 여자


 평등한 관계 속에서 세 사람은 진정한 우정을 쌓는다. 어려움이 생기면 함께 머리를 맞대어 해결하려 애쓴다. 예컨대 소피의 원치 않는 임신을 중지시키고자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소피와 함께 여러 방법을 강구한다. 이때 마리안느는 소피처럼 낙태라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공유하고 있으며,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트라우마와도 같은 고통을 직면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주요 수단은 '회화'다. 회화는 앞서 말했듯 재회의 수단이자 트라우마 극복의 수단, 그리고 이어 말하겠지만 기억의 수단이다.



그림의 기능

 우선 그림과 관련하여 마리안느의 임무, '초상화' 그리기를 꼽을 수 있겠다. 회화는 두 사람 관계의 출발점이다. 둘째로 그림은 마리안느가 낙태라는 고통을 직면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셋째로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끄적이는 스케치들은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기억하려는 최선의 노력이다. 마리안느는 기억의 수단으로 엘로이즈의 모습을 브로치 안쪽에 그려 넣어 간직하고, 또 엘로이즈의 청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책에 남긴다. 때문에 그 책의 특정한 페이지는 '기억'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가이드를 마치며

 필자는 아직 이렇다 할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으나, 이 영화를 보며 느꼈다. 이렇게 절절한 사랑도 있겠구나. 눈물을 흘리진 않았으나, 가슴이 먹먹하게 젖어들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동성애를 다룬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갖기보다, 그저 하나의 사랑 이야기로 본다면 작품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랑, 이별, 재회.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끝나고도 나 혼자의 힘으로 평생을 지속할 수 있는 '기억'이라는 과정까지. 이 영화는 사랑의 그 모든 과정을 섬세히, 절절히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걸작으로 꼽힐 만하다.


-정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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