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 시아마 감독의 작품으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다룬 바 있다. 일명 '타여초'가 국내에서 인기를 끌면서 셀린 시아마의 이전 장편 영화들이 뒤늦게 개봉했다. 이때 줄줄이 개봉한 것이 2006년 '워터릴리스', 2011년 '톰보이', 2014년 '걸후드'다. 세 작품 모두 아동-성인 사이에 놓인 과도기적 존재인 여성 인물들의 변화와 성장을 다루기에 소위 '성장 시리즈'로도 불리는데, 오늘은 이 중에서도 걸후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걸후드는 생계유지에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두 여동생을 돌보는 마리엠(카리자 투레)의 이야기이자, 친구들 간의 의리를 끔찍이 아끼는 소녀들의 연대다. 독특한 점은 영화가 그린 여성들 간의 다양한 관계다. 그럼, 걸후드 가이드를 시작한다.
스틸컷: 조용히 억누르는 마리엠
16살 소녀의 변화무쌍한 성장
걸후드는 오빠 지브릴(시릴 망디)의 가부장적 폭력에 시달리는, 불만을 억누른 채 조용히 지내던 마리엠의 변화로 압축된다. 마리엠의 변화는 때로 도덕적 선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여동생에게 제 오빠처럼 강압적으로 군다거나, 다른 친구들의 돈을 빼앗거나, 또는 가출해 부도덕한 '일'을 하는 식이다. 그러나 일련의 일탈은 그를 더욱 강인하게 만든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을 거듭하는 마리엠의 변화를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
인류의 현 진보사관은 성장을 '더 높이, 더 많이'로 간주한다. 한 마디로 양적 발전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업적을 이룰 때 인간은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더 나아지는 축에는 양뿐만 아니라 질적 측면도 있다. 우리는 더 많은 돈을 벌지 않아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조용히 현실에 순응하기만 했던 마리엠이 분노를 표출하고, 자유의지를 발휘할 용기를 지니게 된 것은 실로 성장이다. 마리엠은 좋아하는 이성 이스마엘(디아바테 이드리사)이 친오빠의 친구라는 이유로 그를 향한 마음을 마냥 억누르지 않고,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확인한 뒤엔 한밤중에 그 애 집으로 찾아가기도 한다.
스틸컷: 이스마엘을 향한 마음을 참지 않는 마리엠
우정과 연대, 적대와 사랑이라는 여성들의 관계
마리엠의 성장을 촉발한 것은 다름 아닌 친구들이다. 김세인 감독의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서 이정이 소희를 만나 감정을 표출하게 된 것처럼, 걸후드에서도 친구들이 그러한 변화의 촉매 역할을 한다. 껄렁하게 다니는 레이디(아사 살라), 아디아투(린지 카라모), 필리(마리에투 투레) 3인방은 마리엠을 멤버로 영입한다. 마리엠은 처음엔 이스마엘의 눈에 띄기 위해서 그들과 어울린다. 그러나 이들이 부당함에 맞서 서로를 지켜주는 방식(주로 '껄렁함')에 매료되면서, 마리엠의 소속감은 점차 깊어진다. 이들은 마리엠에게 '빅(Vic, victory-성공이라는 의미)'이라는 일종의 활동명을 지어준다.
스틸컷: 레이디가 마리엠에게 건넨 목걸이, 'vic'이 쓰여있다
여성들의 연대와 적대가 동시에 보이는 장면이 바로 마리엠 무리와 다른 무리 간의 서열 정리 씬이다. 레이디가 상대 무리 한 명과 소위 맞짱을 뜨는 과정에서 윗옷이 벗겨지는 수치를 겪는다. 소녀들의 적대관계에서, 상대 무리에게 가하는 폭력은 '수치심'인 셈이다. 소년들은"브라만 입은 채 쓰러져 있는 걸 봤다"라며 레이디의 자존심을 짓밟는다. 심지어 레이디는 부모에 의해 머리가 잘린다. 사회적 여성성의 박탈이라는 처벌이다.
이후 마리엠이 레이디의 수치를 되갚아준다는 마음으로 상대 무리 한 명을 넉다운시키는데,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속옷을 칼로 끊어버려 반나체 상태로 만든다. 상대는 일어설 수 없이 그저 가슴을 가린 채 바닥에 엎드릴 수밖에 없다. 여성이 여성을 공격할 때의 전략이 '유약한 여성성을 폭로하는 방식'이라는 것은 다소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여성은 가슴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인식이 여성에게 약점이자 무기가 되는 셈이다.
스틸컷: 싸움에서 진 레이디를 조롱하는 남학생 무리
이런 사건들을 거치며 점점 더 거침없이 표현하고 행동하는 마리엠. 그러나 마리엠은 여전히 오빠 지브릴 앞에선 꼼짝할 수 없다. 정확히는 지브릴의 폭력 앞에서. 지브릴은 월등히 차이나는 체격과 힘을 무기로 마리엠의 목을 조른다. 손으로도 조르고, 두꺼운 팔뚝으로 헤드록을 걸기도 한다. 누군가 그랬다, 목을 조르는 행위는 강자가 약자를 제압하며 제 힘을 과시하는 손쉬운 방식이라고. '저 손아귀에 내 목숨이 달렸다'는 인상이 무의식에 박히면 그 상대에 대한 공포감은 어마어마해진다. 오빠 앞에서만큼은 반항할 수 없는 마리엠은 그의 폭력이 반복되자 집을 나오게 된다.
그렇게 집에서 벗어나 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은 아부라는 업자가 제공하는 숙소다. 마리엠은 남장을 하고 지내며 고용주 아부와 다른 남성 동료들의 성적 대상화에서 벗어나려 한다. 남성적으로 행동하고, 거칠게 말하고, 가슴을 감추기 위해 압박 붕대를 하지만 아부의 눈에는 여전히 '제 밑에서 일하는 여자'다. 견디기 힘든 집요한 시선들 속에서, 마리엠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는 바로 친구이자 동료가 된 레이디다. 레이디와 마리엠은 함께 합숙하며 일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둘의 관계는 평범한 우정 이상으로 깊어간다. 이 작품을 통해 우정과 연대, 적대와 사랑으로 변화무쌍하게 그려지는 여성들의 관계를 감각해 보길 바란다.
스틸컷: 아부 밑에서 일하는 마리엠의 모습
영화에서 묘사된 이성관계와 남성성
작품의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사회구조적으로 조형된 남성성을 -주로 폭력적인 것-으로 비춘다는 것이다. 먼저, 마리엠의 오빠 지브릴을 통해 가부장적 남성성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낸다. 지브릴이 마리엠을 제압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이름을 불러 제 발로 오게 한 뒤 목을 조르는 것. 대화가 생략된 채 오직 힘으로 일방적인 폭압을 행사하는 관계는 마리엠이 일탈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지브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향한 곳도 권위의식에 쩌든 아부 밑이다. 마리엠과 아부의 관계는 주종관계까지 얹어지며 부당한 성적 요구로 번진다. 지브릴, 아부에 이어 눈여겨볼 남성은 마리엠의 연인 이스마엘인데, 사랑이 전제된 이들 관계에서 물리적 폭력은 없지만- 이스마엘의 사고방식에도 별 수 없이 가부장적 회로가 뿌리 박혀 마리엠을 가두려 한다. 예쁘고 귀여운 아내가 되어주라는 그의 요구는 낭만적인 탈을 썼으나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자는 말은 마리엠에게 속박처럼 들린다.
스틸컷: 헤드록을 걸려는 지브릴
남장한 마리엠이 보여주는 남성성도 눈여겨볼 점이다. 마리엠의 남성성은 그가 경험한 남성들을 토대로 폭력적으로 발휘된다. 지나가던 소녀의 손목을 예쁘다며 강압적으로 잡는 동료를 본 마리엠은, 동료를 말리기는커녕 소녀에게 고맙다고 하고 꺼지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한다. 영화는 가부장적 남성성을 다양한 인물과 상황을 통해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스틸컷: 남장을 위해 가슴에 압박붕대를 한 마리엠
가이드를 마치며
개인적으로 걸후드는 셀린 시아마의 영화 중 조형미가 가장 덜 부각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가 지닌 조형미를 좋아하긴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아쉬움은 없었다. 셀린 시아마는 걸후드에서 마리엠과 친구들의 변화무쌍한 성장을 그려내는 속에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잃지 않으려 여러 선택을 했을 테다. 그 결과 만들어진 걸후드는 사회구조적 산물인 여성성과 남성성, 동성 관계와 이성 관계 아래 깔린 힘들에 의문을 던진다. 걸후드는 넷플릭스와 왓챠에서 감상 가능하다는 말을 끝으로, 이만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