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8일, 서울대입구역 인근 영화서점 '관객의 취향'에서 김세인 감독과 함께하는 북토크가 있었다. 자리는 거진 만석. 김세인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을 수료하며 졸업작품으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연출했는데, 2022년을 뒤흔든 독립영화 몇 편을 꼽을 때 이 영화가 빠질 수 없을 정도로 세간의 호평을 받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넷팩상을 비롯해 5관왕을 차지했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발견-대상, 무주산골영화제 뉴비전상, 가장 최근에는 디렉터스 컷어워즈에서 올해의 비전상 등을 거머쥐었다. 해외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는데,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우디네 극동영화제 등에서 공식 초청을 받았다.
작품으로- 그것도 호평일색으로 영화계를 뜨겁게 달군 만든 이는 언제나 필자의 관심을 끈다. 바쁜 일정으로 인해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음에도 북토크 공지를 보고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각본집이 출간되면서 진행되는 행사였다.
3월 8일 북토크 사진_본인 촬영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가 남긴 인상
벼락치기. 북토크 시작 전에 각본집은커녕 영화라도 다 보면 다행이었다. 결국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어찌어찌 영화를 다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든 생각은, 김세인 감독이 사건을 직조하는 방식, 인물을 움직이는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카메라를 움직이는 방식이 이창동 감독을 연상시킨다는 것이었다. 다른 감독의 작품을 마주하며 '이창동스럽다'고 이토록 강렬히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경과 이정_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컷
김세인 감독은 여성서사에 강하다. (여성서사, 여성영화라는 말은 제 정점을 찍으면서 서서히 저무는 말이 될 것이다!) 물론 이창동 감독도 여성을 삶과 이야기의 주체인 '인간'으로서 섬세히 조명하는, 손에 꼽히는 감독이라고 생각해왔다. <시>에서, 그리고 <밀양>에서 사죄/복수의 주체로서 넓고 깊은 인간성을 드러내는 주인공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김 감독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모녀관계를 지독하게, 뼈 시리게 연출한다. 무조건적으로 헌신적인 어머니, 모든 위험을 온몸으로 막아서는 초월적 모성애는 없다. 오히려 인물 중심에는 자신의 욕망과 고통이 최우선하는, 인간 보편의 '이기성'이 있다. 수경(양말복)은 기존 영화계에서 제대로 비추지 않았던 중년 여성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물로, 자신의 쾌락과 대인관계가 딸 이정(임지호)을 보살피는 것보다 더 앞선다. 사실, 이정의 나이가 20대 후반쯤으로 설정된 것을 볼 때 수경이 보호자로서 딸을 보살필 의무를 논하긴 어렵다. 그러나 이정의 회상을 고려하면 수경은 과거에도 '좋은 엄마'는 아니었다.
수경_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컷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사회가 만들어낸 '좋은 엄마'란 무엇인가. 수경은 '좋은 엄마'의 프레임 안에 전혀 속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좋은 엄마'를 운운하기 이전에 생부의 행방을 물어야 한다. 홀로 이정을 키운 수경에겐 출산과 기본적 수준의 양육으로도 힘에 부쳤을 것이다. 수경에게 이정은 배 아파 낳은 딸, 심하게 말하면 '내 아픔을 양분 삼아 자란 생명'이다. 홀로 세상과 부딪히면서 이정과 자신의 삶을 어찌어찌 연장해 온 수경에게 딸을 향한 폭력은 너무도 쉽게 합리화된다.
영화는 이 합리화된 폭력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영화는 수경의 삶을 눌러온 것들의 무게를 드러냄으로써 일방향의 가해자-피해자 틀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가 고통받는 존재임을 지적한다. 고통의 순환, 혹은 삶을 부여받은 자들이 견뎌야 하는 무차별적 고통. 수경에게 출산은 그런 일 중 하나였을 테다. 이정의 탄생은 그런 고통 중 하나였을 테다. 사실, 모두의 삶은 어머니의 고통과 함께 시작되지 않는가. 하지만 축복은 모든 탄생에 수반되지 않는다. 축복은 몇몇 선택받은 자들의 것이다.
영화에서 수경의 탄생을 보여주진 않지만, 각본집에서는 수경 또한 축복받지 못한 탄생이었음이 드러난다. 수경은 고통의 대물림 속에서 나고 자랐기에 '좋은 엄마'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매스컴에서 만들어낸 신화적 어머니상은 그에게 낯선 것이다. 그래서 애인 종열(양흥주)이 그의 딸 소라(권정은)에게 보여준 따뜻함은 거북하게 다가온다. '자식에게 져주는 부모'를 본 적 없이 살았을 수경에게, 종열의 사과 요구는 이해 못 할 행위다.
이정과 소희_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컷
수경의 폭력이 부당함을 깨달은 이정은 폭력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정의 변화에 힘을 보탠 인물로 소희(정보람)를 빼놓을 수 없다. 소희는 이정과 유사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지만 이정과 달리 일찌감치 집을 나온 인물로, 이정이 처한 현실을 알고는 그의 아픔에 공감하며 자신의 침대를 며칠간 내어준다. 그러나 배려와 공감은 언제까지고 지속되기 어렵다. 공감은 연대하는 힘과 용기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공동의 몰락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감정의 전이'가 가진 양면 중 긍정적 측면은 이정에게서, 부정적 측면은 소희에게서 나타난다. 이정이 쏟아내는 상처가 소희를 다시 폭력 어린 본가로 밀어 넣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소희의 변한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결과적으로 소희에게서 긍정적인 변화의 동력을 얻은 이정은 자신의 현실이 단단히 잘못됨을 실감하고, 변화를 위해 발버둥 치기 시작한다.
인물들을 늘어놓고 생각해보면 이들은 모두 감정과 감정으로 이어져 있다. 예컨대 수경은 딸 이정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마구 배설한다. 이정은 소희에게 하소연의 방식으로 이를 털어놓는다. 감정의 연결고리가 선과 선으로 이어진 관계는 드물다. 당신 주변에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배설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토크에서 전한 말
지난 3월 8일, 독립서점 '관객의 취향'에서 북토크가 열렸다. 박소예 대표(왼쪽)와 김세인 감독(오른쪽)_본인 촬영
북토크에서 김세인 감독은 '빛의 순환'으로 인물들 간의 관계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아파트가 정전되면서 이정이 샤워하는 수경을 핸드폰 플래시로 비춰주는 씬인데, 바로 이런 장면들에서 빛의 방향과 움직임이 도드라진다. 김 감독은 "빛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는데 편집 과정 등에서 잘려 나가고 하면서 그런 의미들이 다소 흐려졌다"라며 "개인적으로 설계했던 부분들을 각본으로나마 온전히 남길 수 있게 되어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구조적으로 두 인물(수경과 이정, 모녀)이 서로에게만 뭔가를 쏟아부을 수 없게끔 고립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생각했다"
고 덧붙였다. 이는 '딸이 아들보다 착하다', '나이 들면 딸이 최고다'라는 식의- 편의에 근거한 오늘날 딸 선호론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가이드를 마치며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김세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데뷔작부터 세간의 집중을 받은 그의 차기작이 더욱 기대된다. 한국 영화감독 중에서도 이창동 감독의 팬인 필자에게는 너무도 반가운 감독과 작품이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의 이창동스러움에는 양말복 배우도 한몫했다. 그의 얼굴과 표정에서 때로는 <밀양>의 신애(전도연)가, 때로는 <시>의 미자(윤정희)가 보이기 때문이다. (연기를 이끌어내는 것도 '도연'으로서 감독의 몫이다.)
본 작품을 영화로 즐겼다면, 각본집으로 그의 영화적 세계를 더 내밀하게 알아가보는 것도 좋겠다. 각본집에는 김 감독의 에세이도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영화 프로덕션 과정과 개봉 이후 느낀 감정들이 진솔하고 대담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유로운 주말 어느 틈에 각본집을 읽어보길 권하며, 오늘의 가이드는 이만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