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누구보다 좋아한다고 말할 때, 안 봤다고 말하기 부끄러워지는 영화들이 있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그런 영화 중 하나다. 관객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건 아니었지만, 특유의 수채화 감성으로 마니아층을 만들어낸 영화. 필자는 지난 22일 코엑스에서 열린 GV에 참여해 민용근 감독의 각색 스토리를 듣고, 김다미와 전소니의 인물 해석에 경청했다. GV 문답과 함께, '소울메이트'를 감상하며 주목할만한 몇 가지를 짚어보자.
스틸컷: 10대의 미소와 하은
그간 관계를 정의해 온 속 좁은 방식
<소울메이트>를 보면서 당신 안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의문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어떤 관계라고? 어느 장면에서는 둘도 없는 단짝, 어느 장면에서는 둘만 있는 사랑. 어느 때엔 함께 먹고 자는 자매, 또 어느 때엔 질투 어린 우정처럼 보인다. 시간과 사건이 얽혀 둘 사이를 메우고 가르면서 안미소(김다미)와 고하은(전소니)의 감정도, 관계도 복잡해진다. 삼각관계로 우정이 오해로 부식되는 여타의 이야기처럼, 둘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변수로서 함진우(변우석)가 쓰인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서는 미소와 하은의 우정이 더욱 단단했음을 알게 된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스포 방지를 위해 하지 않겠다.)
스틸컷: 미소, 하은, 그리고 진우
민용근 감독은 둘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소와 하은의 관계는 언어로 규정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는 언어로 규정할 수 있는 것보다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언어권마다 규정할 수 있는 대상과 그 범위도 다르다. 예컨대 우리에게 하늘의 빛깔을 규정할 수 있는 표현은 하늘색, 남색, 붉은색, 주홍색, 보라색, 까만색, 잿빛 등등이 있다. 그런데 이누이트족은 우리가 '하늘색' 하나로 퉁치는 푸른색의 스펙트럼 영역을 수십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이 하늘색을 더욱 기민하게 식별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에게 미묘하게 다른 각각의 색에 부여할 단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호적 관계를 정의하는 항이 단 몇 개인 사람들에겐 미소와 하은의 관계가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관계를 단 하나의 항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비규정성이 둘의 관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그저 친구 관계도, 그저 연인 관계도 아닌, 너와 나의 관계. 너무도 구체적이고 특정적이어서, 어느 한쪽이 사라지면 성립할 수 없는 관계. 이러한 비규정성은 '관계'뿐 아니라 '개인'에도 적용된다. 미소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은은 '정적인 정물화'로 성격화되지만- 이들은 이를 벗어나는 수행적 실천을 통해 서로에게 번진다. 자유로운 정물화처럼.
서로를 수행하는 두 사람 이야기
20세기 철학의 한 축을 이루는 실존주의, 그 중심에 선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프랑스)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본질'이 아닌 '실존'이라고 본다. 인간이 본질적 존재라는 사유는 쉽게 말해 운명론적 사고다. 나의 본질이, 당신의 본질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 가위는 다른 무언가를 자르기 위해 존재하고,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나도 당신도 무엇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중세엔 인간을 '신을 위한 존재'로 인식했고, 그에 맞게 사람들은 제 삶을 신을 섬기는 데 전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사르트르는 이러한 본질적 존재론을 부정한다. 그는 인간이 실존한다고 말한다. 실존은 고정적 본질을 상정하는 것과 달리 그 어떤 것도 미리 정해지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제 의사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은, 제 의지에 따라 얼마든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의 존재다.
가능성을 자신의 뜻대로 이끄는 방법은 단 하나, '수행(perform)'이다. 본래 착한 사람은 없다. 착하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당신이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렇게 행동하면 된다. 이는 인간이 행하는 매 순간의 선택과 행동에 엄청난 자유를 주는 관점이며, 동시에 엄청난 책임을 묻는다. 인간이 탓할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저 자신뿐이 된다.
스틸컷: 10대 미소
미소와 하은이 서로 닮아가는 과정은 이러한 수행을 기반으로 한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불리는 미소의 과감함을 선망하던 하은은, 결정적 순간에 그 자유로움을 발휘해 미소처럼 살아가려 한다. 학창 시절을 바쳐 이룬 교사의 꿈(물론 이 꿈은 하은의 것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을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며 남들처럼 평범하게, 안온하게 그려갈 삶의 궤도는 모험적으로 급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부모가 거의 부재한 학창 시절을 보낸 미소는 자유와 생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늘 노력한다. 하은의 안정적인 삶과 대조적으로, 미소는 도전적이고 위험하고, 끝끝내 용감했다. 이런 미소가 이십 대에 대안가족을 찾으며 안착한 삶은 하은의 삶과 닮아있다.
스틸컷: 10대 하은
이러한 닮음은 우연이 아니다. 떨어져 있는 매 순간 서로를 그리워 한 마음이 서로를 닮게 한다. 일상을 편지로 주고받으며, 둘은 끊임없이 서로를 지향한다. 요컨대 미소는 하은을, 하은은 미소를 수행하며 삶을 서로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물론 영화는 말미에 한번 더 반전을 만들어 하은과 미소, 두 사람 삶의 진실을 순식간에 뒤집는다.
스틸컷: 20대 하은
전소니 배우는 사랑을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이 궁금해지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러니까 하은에게 사랑은 '당신을 화폭에 담고 싶은 마음'이다. 극사실주의 초상을 그리면서 대상에 대한 제 마음이 확고해진다는 하은의 말은, 차후 완성되는 거대한 미소 초상화에 전율을 더한다. 화폭에는 그날의 미소가 숨 쉬고 있다.
스틸컷: 하은이 그린 미완의 미소 초상화
전소니 배우는 미소의 초상화를 떠올리며 "너무 사랑해 마지않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여직 떨림을 간직하고 있었다.
감상적인 음악과 '너무도' 운명적인 둘
미소와 하은의 수행은 운명적 관계를 더욱 두텁게 한다. 운명이란 것은 없지만, 수행을 통해 운명적이게 될 수는 있다. 그런데 두 사람, 너무도 운명적이다. 물론 그러한 측면이 영화의 핵심 전제이기도 하지만, 감성적인 음악이 멎지 않는 연출은 관계의 운명성을 다소 부담스럽게 만든다. 이 때문에 <소울메이트>의 몇몇 장면들은 오글거림과 몽글거림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이러한 인상은 필자의 취미(Taste) 탓일지도 모르니, 여러분이 직접 보고 느껴보시길 권한다.
가이드를 마치며
미소와 하은의 관계는 스페인 영화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2003) 속 마르코&베니그노와도 닮아 보인다. 마르코와 베니그노의 관계도 우정처럼 보이지만 실로 여느 사랑보다 두텁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베니그노가 수감됐을 때는 마르코가 베니그노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베니그노를 '수행'하게 된다. 사랑과 우정의 모호함, 그리고 수행성이라는 두 테제는 <그녀에게>를 감상할 때도 유용할 것이다.
한편, 이 영화는 전소니, 김다미, 변우석 배우 모두가 반짝이는 순간이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장성란 영화 저널리스트는 이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수채화 감성'이라 말하기도 했는데, 곱씹을수록 아름답게 맺히는 장면들이 분명 있다. 여러분의 가슴에는 어떤 장면들이 아름답게 머물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