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퇴사 사유. 저 입대했나요?
서울이 시베리아보다 더 춥다던 겨울, 나는 지독한 성희롱의 늪에서 탈출해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았다. 다행히 새 근무처는 집에서 가까웠고, 왕복 4시간의 공포에서 겨우 벗어났다.
처음 인수인계를 받던 날, 전임자가 묘한 뉘앙스로 말했다.
"업무야 뭐 똑같고. 저보다 잘 아시니까. 근데 아쉽겠어요. 거긴 그래도 가족 같잖아요."
족같긴 했는데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어느정도 가족 같은 것도 사실이었다. 구성원 취급을 안해줬을 뿐 나랑 같이 어울리고 싶어 하긴 했으니까. 나는 담담한 척 대답했다.
"아 뭐 그렇죠. 여긴 어때요? 분위기."
"... 뭘 상상하던 그 이상이라서 설명하기 어렵네요."
전임자는 나처럼 로테이션 되는 게 아닌 '퇴사'였다. 그리고 이 전임자의 전임자도 2달 전에 관뒀고, 전임자의 전임자의 전임자도 2달 전에 관뒀다고 했다.
아니 대체 이렇게 취업이 어려운 세상에서 줄줄히 관두지? 이상했지만 전임자의 얼굴이 너무 심각해서 물어볼 수 없었다. 장군같달까. 전쟁에서 큰 패배를 겪고, 부상을 당한채 힘들게 본진으로 돌아와 "적들이..쳐들어옴...너네...이제 죽을거임...먼저 감..."하고 메세지를 전하는 장군. 뭔가 비장하고, 처량하고, 슬펐다.
하지만 나 역시 장수 아닌가. 이미 성추행, 폭언, 인간 이하의 취급에는 익숙해졌다. 니들이 블랙기업이라면 나 역시 블랙이 되어 같이 청룡언월도를 위 아래 위위 아래 찔러주겠다. 그렇게 다짐했다.
전임자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채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서로를 적대하는 건 묘한 분위기는 실적중시 유통회사의 고질적 문화였고, 내 이전 근무지가 환경이 좋았다는 건 아닌데, 그와 별개로 여기는 좀 이상했다.
다른 곳이 자신의 행복만을 찾느라 남의 행복을 등한시 했다면,
이 곳은 서로의 불행을 바랐다.
그리고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애썼다.
어느 날,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는 선배가 말했다.
"영업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지~ 동물의 왕국이잖아."
나는 대답했다.
"언니 그거 동물 혐오야. 신고할거임"
진짜였다.
이게 동물의 왕국 시나리오라도 '동물은 그렇게 야만적이지 않아요!' 신고 당할 것 같았다. 그냥 객관적으로 성격이 더럽고 유치하고 무식하고 유치한 건데, 왜 동물에 비유한단 말인가.
그저 원색적이었다.
그동안 일하던 곳들이 불합리하다고 한들, 이정도로 단순하지도 않았다.
먹이사슬, 왕따, 갑과 을, 그리고 병과 정. 계급놀이, 기 싸움, 실적 훼방.
지니어스 찍나? 싶은 수 많은 관계들을 이틀만에 파악한 다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저렇게 안 태어나서 다행이다" 였다. 그 정도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공통적인 취미생활이 있었다.
바로 "이등병 괴롭히기"였다.
여기서 이등병이란, 직급이 낮고, 근속연수는 짧으며, 잡일을 담당하는 핵심전력 외 직원들... 그래. 나를 지칭했다.
수드라든 바이샤든 브라만이든, 결국 그들 아래 "찬달라"라는 불가촉 천민이 있다는 건 절대적인 사실이었다. 사회의 단결을 위해, 서로가 안 맞을 땐 거기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자기들이 잘 맞을 땐 서로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불가촉 천민은 철저히 이용당했다.
이후에는 정치행동으로 발전했다. 팀장은 결속력을 끌어올려야 할 때 (영업 목표가 필요할 때 등)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욕을 하며 팀워크를 다졌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행동이었다. 고통과 부당함을 푸는 방법으론 약자를 괴롭히는 것 만한 게 없으니까.
괴롭힘이라고 해서 뭐 고등학교 시절처럼 때린다던가 엄청난 폭력은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인 행동은 '온풍기 끄기'와 '청소시키기'였다.
실내에는 히터와 온풍기가 3~4개 정도 있었고, 가끔 "환기좀 시키자"는 명목으로 바로 외풍이 들어오는 우리 자리에 있는 히터를 껐다. 유통회사니만큼 외투를 입고 근무할 수 없었다. 내복도 복장불량이었다. 영하 18도의 강추위였던 겨울. 나는 매일매일 열린 문 앞에서, 티셔츠 한장을 입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막내는 고객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하도 몸에 손난로를 많이 집어넣어서, 이미 몸은 화상자국으로 가득했다.
추운 와중에 자꾸 머리속에선 딴 생각이 들었다.
이거 진짜 취직 맞나? 몰카인가? 나 입대한 건가? 혹한기인가?
날씨도 날씨였지만, 더 기분 나쁜 건 '저들이 있는 곳은 따듯하다'는 사실이었다.
나머지 히터는 다 돌아가고 있고, 저들은 앉아있다는 사실.
음산하고, 지옥같고, 기분 나쁜 일이었다. 출근을 하면 내장이 꼬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속이 체한 듯 답답하고, 한숨을 쉬지 않으면 목이 졸리는 기분이 계속 들었다.
어쩌다 이 팀의 '막내 문화'가 이렇게 됐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신입 보안" 명목으로 우리는 단체 채팅 방에도 초대되지 않았고, 아침 회의에도 참가하지 못했고, 정례에도, 회식에도 참여하지 못했으니까. 그 시간에 주로 행주로 테이블을 닦거나 종이를 파쇄하고 인쇄를 했으니까.
억지로 '놀자고 안하니 오히려 좋아' 나를 합리화 하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죽을 것 같았지만, 인간은 쉽게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내가 "그만 둬야 겠다" 생각한 건, 말하기도 창피한 쪼잔한 사건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