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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간 김개똥 Feb 08. 2023

어느 날, 김공황(Airport kim)이 되었습니다

공황장애에 대한 생각들

"공황장애와 우울증입니다. 약물 치료가 필요해요."

"뭐... 뭔 장애요?"


공황장애라면 그 연예인 걸리는 병 말하는 건가. 김구라 아저씨랑 이경규 아저씨가 걸렸던? 정신과 상담실에 앉아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문을 나서는 길에, 정신과를 가라고 100번 이야기했던 J에게 카톡을 보냈다.


「야 나 공황장애래 나를 에어포트 킴이라 불러조」

「그건 공항이고 미친놈아 그게 드립칠 일이냐?」


J의 답장에 왠지 웃음이 나와 피식 웃었다. 뭐 공황이 웃을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뭔가 와닿거나 슬픈 일은 아니지. 왜냐하면 겨우 이런 통보 때문에 슬프긴 나는 너무 힘들었다. 


나는 꽤 오랜 시간을 無로 지내왔기 때문이다. 슬픔도, 고통도, 기쁨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로. 나의 이 고통스러운 감정을 의사 면허 있는 여자가 확정 내려줬다는 것 만으로 슬픔이 배가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는 꽤나 강한 사람이었다. 나약한 소리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타입의.


살짝 시니컬하고 컨트롤프릭적인 면이 있긴 했지만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면 세상에 '실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 한 명이 '자존감 수업 책 읽어봤냐'라고 나에게 물었을 때, 다른 친구가 "쟤가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신경 쓸 사람으로 보이냐"라고 반문했을 정도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단어를 보면 나도 용기가 필요해! 가 아니라 '미움받는데 왜 용기가 필요해? 별 같잖은 사람이 날 미워하면 잘 살고 있다는 증건데 그냥 스루하삼'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사람. 


그러니까 정신적인 문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는. 

적어도, 그 회사를 나오기 전까지.




붙여주면 대장으로 줄넘기도 할 수 있을 것 같던 그 회사에서,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하고 뛰쳐나왔다. 

패기 같은 건 아니었다. 그냥 거기 사람들이 죽을 만큼 싫었을 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 공채에 뛰어들었다. 서류전형, 인적성, 1차 면접, 최종면접을 거쳐 '최종합격'까지 겨우 메달을 따냈다. 

22개의 회사들로부터 '제한된 채용인원으로 어쩌구 ㅈㅅㅈㅅ' 하는 답장을 받았고, 3개 회사로부터 '축하합니다!'라는 답장을 받았다. 25전 22패 3승. 채용 시장에선 나쁘지 않은 스코어다. 하지만 내 기분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진짜로 낫도낫도 하낫도


별 말도 안 되는 회사에서 똥 같은 놈과 비벼비벼하며 생지옥을 겪고 나니, 합격 통지서가 마치 영장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뭐랄까. 30살 남자 아이돌이 받은 영장이랄까.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는 헬로우 지옥 통보. 전 회사 경력 때문인지 다 비슷한 업계의 비슷한 직무로만 합격한 게 문제였다. 조건도 고만고만. 월급은 더 내려갔는데, 일은 더 힘든 곳들. 뻔히 보이는 지옥에 다시 발을 들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는 희대의 슈퍼뻘짓을 했다. 미친년코리아 같은 걸 하면 아마 眞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세 회사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던 어느 날, 마지막회사의 예비소집일을 하나 남기고 급격한 호흡곤란 증상을 느끼고 후쿠오카행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도주했다. 


그것이 20대 후반에 맞이한 공황장애 첫 증상이었다.

철없는 애새끼로 가는 퇴행열차.




그 이후부터였다. 나는 속에서부터 완전히 고장 나버렸다.

애새끼 퇴행열차를 타고 일차원적인 생각과 행동만 하는 바보가 된 것이다


생각이 짧아지고, 충동적이고, 불안해했다.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연락처를 리셋했다. 초라한 내 모습을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바랐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단절의 끝엔 깊은 외로움만 남았다. 

나는 단 음식을 늘 입에 달고, 초콜릿을 탐하고, 가끔 엄마가 없으면 울었다. 우리 집 강아지도 저렇게 살진 않는데. 가끔 침대에 누워있으면 목을 맨 나의 환영을 보기도 했다. 


물러날 곳은 저곳뿐인가.

그렇게 고통 속에서 잠드는 날이 몇 달이 지속됐다.


그리고 그 끝에 나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여러 가지 감정을 담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정신과를 가보라 설득하는 J의(유일하게 카톡에 남아있던 친구) 말에 "진료비 아까워.. 그렇게까지 안 살고 싶음" 하고 오랜 시간을 넘겨왔다. 


그리고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정신과와 마주쳤다. 

새로 지은 빌딩에 닭강정집이 생겼다고 해서 헤매다가 발이 멈춰 선 곳이 정신과 앞이었다. 운명처럼 이끌려 들어갔고, 운명처럼 예약된 사람이 없어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황당한 우연으로, 나는 나를 얽매여온 눅진한 그림자와 마주했다.



*** 이 기록은 1년간 우울증(중증, 위험군), 공황장애와 싸우던 환자가 2개월에 후 '황당하게'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극복한 일기의 복원본입니다. 현재 진행되는 이야기가 아니며, 다소 황당한 결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본래 진지한 인간이 아니라 말이 가볍습니다. 솔직하게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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