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부터 은행 약국 등을 돌아다니다 보니 진이 빠져 점심은 김밥 한 줄로 때우기로 한다. 그러고 보면 때운다는 말이 무색하게 김밥은 한 끼 식사로 훌륭하다. 밥과 야채 고기까지 한 끼에 채워야 할 영양소가 다 들어있다. 한 줄에 천 원 하던 시절도 있었다. 서민들의 배를 채우기도 했지만 싼 음식이라는 천덕꾸러기 같은 오명도 있었다. 그러나 내게 김밥은 정성 가득한, 벼르고 벼르다 큰맘 먹어야 해치울 수 있는 숙제 같은 음식이다.
김밥을 기다리며 메뉴판을 바라보니 요즘은 김밥집에서도 다이어트용 김밥을 판다. 키토 김밥이니 두부 김밥이니 이름도 다양하다. 유튜브에서 양배추나 두부, 달걀만 넣고 김밥 만드는 걸 봤다. 엄밀히 말하자면 김밥의 형태를 띠었을 뿐, 밥은 안 들어갔으니 김밥이라 부르긴 애매하다. 그렇다고 김두부라고 할 수도 없고.
김밥 한 줄과 맑은 장국이 나온다.
이 동네 여러 군데를 다녀봐도 맛있는 김밥집을 찾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하나를 입에 넣는다. 김밥은 역시 집 김밥이 제일 맛있다. 어릴 때 소풍날이면 엄마는 어김없이 김밥을 준비하셨다. 윤기 흐르는 흰쌀밥에 고소한 참기름과 맛소금으로 살짝 간을 한 영롱한 탄수화물의 결정체. 엄마도 그날만큼은 분홍 소시지가 아닌 햄을 준비하셨다. 주부가 된 후 따로 엄마에게 요리를 배우지는 않았다. 다만 내 혀 끝에 남은 어린 시절의 미각을 일깨워 시도해 보는 요리 중 하나가 김밥이다.
나는 김밥을 잘 만다. 단단하게 풀리지 않게 마무리한다.
이럴 때 보면 내 손끝도 야무진 것 같다. 그럼에도 자주 해 먹을 수 없는 게 김밥이다. 김밥의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장처럼 장황하다. 그래서 엄마는 소풍 전날 밤부터 못 주무시고 재료를 썰고 볶고 준비했다. 당일 아침은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말았다. 집안에 퍼지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잠을 깼고 김밥 마는 엄마 옆에 앉아 김밥 꼬다리를 얻어먹곤 했다. 삼십 대의 젊은 엄마 옆에 올망졸망한 우리 삼 남매의 모습이 소풍날 아침의 기억이다.
처음 김밥을 말게 된 건, 아이의 유치원 체험 학습 날이었다. 이런 감각도 재능이라 부른다면 나는 김밥 마는데 재능이 있었다. 흰 밥에 소금과 참기름의 농도 조절을 적당히 해야, 김에 밥이 잘 달라붙는다. 밥도 김에 얇게 저미듯 펴 발라야 한다. 곧 자만심이 생겼다. 그 이듬해 체험 학습 날에는 모든 재료를 준비해 놓고 밥통을 여니 밥이 없었다. 시간이 촉박해 옆집에서 밥 한 공기를 동냥해 딱 도시락만 싸서 보냈다.
이젠 어쩌다 김밥을 싸게 되면 시금치와 당근의 양을 조절해 잡채까지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저질 체력을 자랑하는지라 ‘벼르고 벼르다 큰맘 먹어야 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런 큰 일(?)들을 자주 하는 요리 인플루언서, 요리 유튜버들에게 존경심이 절로 생긴다.
건강한 다이어트도 좋지만, 역시 김밥은 볼이 미어터지게 밥을 씹는 게 매력이다. 씹을 때 코로 참기름 향이 들이쳐야 아, 이 집 김밥 좀 잘 아는구나 싶다. 그러나 파는 김밥에 참기름의 은혜를 베푸는 식당은 좀처럼 없다. 역시 김밥은 집 김밥이다. 원가 따위 생각하지 않고, 내 새끼 뱃속에 들어가는 기쁨만 생각하는 어미의 손이 마는 집 김밥 말이다. 그러나 이젠 남편도 훌쩍 커버린 아이도, 거의 매일의 저녁식사를 밖에서 먹고 들어온다. 김밥을 말아서 오랜만에 엄마집에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