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글, '부모',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에 대해 써보세요.
오늘도 사전 뒤지는 나를 본다. '부모'라는 단어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생각과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 추려져야 시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에 백과사전 같은 범주를 줄여줄 '물려받다'를 뒤적인다.
물려받다 : 재물이나 지위 또는 기예나 학술 따위를 전하여 받다.
나는 무엇을 전하여 받았나?
아빠와의 어느 날.
중학교 3학년, 학교가 끝나면 중환자실에 계신 할머니의 보호자로 하교를 하고 집에 가서는 고3 언니의 눈치를 보며 집안일을 하던 어느 날 아침 아빠가 물었다.
"수아야? 바다 보러 갈래?"
".... 어? 응..."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거는 아빠, '집안 어른이 돌아가셔서 나를 데리고 간다' 결석을 알린다. 아빠 차를 타고 말없이 가는 시간, 도시에서 자연으로 바뀌는 차창 밖만 본다. 말도 좀 하고 노래도 흥얼거릴 법 한데 나도 조용하다. 큰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에 서서 말없이 바다만 한 참 바라보다 밥을 먹는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아빠와 나는 별 말이 없다. '왜 바다를 보러 왔는지, 할 말이 있는 건 아닌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말하지 않았던 숨죽인 사춘기의 가을 끝자락, 차가운 바닷바람과 냄새를 가득 담고 돌아온다.
엄마의 일상.
푸르스름한 아침에 출근해 어둠 속 퇴근을 한 엄마의 손에 배추와 무가 담긴 박스가 들려있다. 세련된 옷차림, 커리어우먼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박스의 풀떼기들이다. 밤 10시부터 시작되는 배추 썰기, "딱, 딱, 사악 사악" 벗겨지고 잘리는 채소들, 눈 내리듯 굵은소금이 뿌려지면 엄마는 그제서야 수혈하듯 커피를 탄다.
"어구구구..." 소파로 쓰러지는 소리. 입만 갖다 댄 커피, 누울 때부터 감겨있던 눈, 잔 채로 누운 건지 눕자마자 잠든 건지 알 수 없는 상태, TV소리만 왕왕한 거실에 음속의 속도로 엄마는 잠이 든다. 분명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 다시 뜨는 눈, 딱! 절이는 시간만큼만 몸은 알람을 맞추었나 보다. 배추와 칼칼한 양념의 버무려짐, 손을 움직일수록 매콤한 향이 피어오르고 "엣취~ 엣취~!" 따라오는 재채기에 김치통이 채워진다.
"엄마, 어떻게 그렇게 해... 일하고 와서... 이 시간에 김치를 담가?"
"아! 김치는 먹어야지요~"
별 일이냐는 듯 뱉어내는 한 마디,
"얼른 자 이제."
"못 자요. 머리가 복잡해서~~ 머리가 비어져야 자지.... TV를 봐야 해~"
차갑게 식은 커피를 다시 마시며 올리는 볼륨. 소파에 앉아 채널을 돌리지만 화면이 어른거리는 눈에는 초점이 없다. 왕왕대는 소리만이 엄마의 귀와 머리를 돌다 밖으로 흘러 나가는 것이 보인다. 시간이 지속되며 엄마의 얼굴이 풀어진다 '흠~' 편안한 숨이 몸속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온다.
나는.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현실에 답답하다가도 밖으로 나가 발을 떼면 온몸을 스치는 바람의 갈라짐이 좋고 내딛는 발과 몸의 움직임이 만드는 리듬이 좋다. 가볍게 리듬을 타면 내 몸은 춤을 춘다. 어떤 음악이든 나만의 그르부를 갖고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세상 멋진 댄서가 된다. 소주 한 병 정도의 취기처럼 야릇하면서 자만하게... 그 순간만큼은 나를 넘어설 자가 없이 느껴진다. 이건 나만 아는 느낌. 아무도 모른다. 달리는 무대 안, 나만이 추는 춤, 현실을 벗어난 분위기, 흥건한 낭만이다.
숨죽인 사춘기의 어느 날 '가을 끝자락의 차가운 바다'가 가슴에 들어왔을 때 '낭만'은 그렇게 아빠에게서 나에게로 전해졌다.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내가 지워져 갈 때, 그것이 주는 압박감과 무게감이 벅차오를 때 현실의 일탈, 거기서 얻는 에너지와 여유를 아빠는 알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한 번 돌아서고 팽팽한 줄을 잠시 놓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아빠는 말없이 말해 주었다. 한 번의 환기에 달라진 현실은 없지만 '하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괜찮은 현실'이 있다. 그리고 닫혀있는 관념의 방을 열어 다른 방법과 방향을 바라보는 내가 있다. 그렇게 현실은 아주 미세하지만 나의 힘 안에서 항로를 다시 잡아 나간다. '낭만'은 이렇듯 현실을 바꾸며 살게 한다.
그리고 나는 계속 달린다. 짧은 달리기에서 마라톤으로 이어짐을 선택한 나는 계속 달린다. 10km, 20km를 넘어 42.195km를 달리는 일은 춤을 추는 것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고통을 내 몫으로 받아들이고 수없이 드는 생각과 질문을 떠안은 채 '완주'라는 지점에 다다르는 것이다. 온몸에서 뿜어내는 통증이 '이게 맞아?' 연이어 물어댈 때 내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은 오직 '발구름'이다. 무덥고 맹렬하게 추웠던 달리기의 시간, 차오르다 못해 토해냈던 숨이 어떤 물음에도 멈추지 못할 끈기의 발구름을 만든다.
밤 10시 김치를 담그는 엄마에게는 거센 끈기가 있다. 자기 이름 석자와 엄마, 두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과하게 요구되는 책임을 받아들이고 이어왔던 시간의 끈기. 원하는 일이라서, 해야 하는 일이라서 노력의 더 함과 덜 함이 다르진 않았을 텐데 엄마는 그 시간을 묵묵히 쌓았다. 엄마자리는 피곤했지만 몫을 해내며 책임을 지켰고 당신 이름의 자리에서 호기로울 수 있게 했다. 서로의 자리를 이어주는 세찬 끈기가 있다.
나의 발구름에서, 삶의 면면에서 아직은 절반 밖에 전해지지 않은 끈기가 흐른다. 그래서 다행스럽다. 아직은 더 많이, 거세게 흐를 끈기가 남았기에.
나의 부모님은 매우 다르고 또 같다는 것을 느낀다. '낭만'과 '끈기'라는 상반됨을 물려주셨지만 그것은 삶을 지키고 나아가게 하는 동일한 자원이 됨을 보며 '그래서 부부셨구나!' 함을 생각하게 된다. 두 번째 글은 쉽게 시작하여 매우 어렵게 매듭지었다. 오랜 세월 각자가 되신 두 분 이기에 '부모'라는 하나의 단어로 의미가 만들어지지 않고 각기 지난 시간을 거슬러 생각해야 했음이 있다. 힘들었으나 매우 값졌다. 두 분과의 시간을 더듬는 것도, 찾아낸 장면에서 전해받은 의미를 찾은 것도 모두 귀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감사하다. 전해주셨기에, 이것을 통해 삶을 잘 운용할 수 있고 좋은 방향을 바라보며 사는 힘을 주셨기에 깊이 감사하다. 사랑해요. 엄마,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