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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와우 Jan 27. 2023

가장 먼저 답해봐야 할 질문 2 (조금 지난 이야기)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가?'-그렇게 길을 찾아가다가

'주경야독'이라 하나요? 같은 미대를 졸업한 선배의 권유로 20여 년 전 매우 신선했던 '아동심리미술'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미술은 어찌 된다 하지만 '심리'는 전무했기에 대학원을 다니는 선배(원장님)의 커리큘럼? 대로 프로이트와 로웬펠드, 에릭슨, 매슬로우 등 처음 들어보는 학자들의 이론을 닥치는 대로 익혀나갔어요. 어찌 보면 자격이 부족한 선생님으로 저와 함께했던 친구들은 미숙함에 부딪히고 그래서 존재했을 순수함에 함께 뒹구르며 그 시기를 지나왔단 생각이 듭니다. 부족했지만 이론이 알려주는 보이지 않는 부분의 이해가 공부의 욕구를 더 키워갔어요. 그리고 조금씩 '이거구나' 내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습니다.


선배의 학원을 떠나 홀로 '심미안-마음으로 그리는 미술'이란 나름의 브랜드^^를 만들어 미술과외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반응이 좋았어요. 아이들의 미술표현에 담겨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이의 특성에 따라 대응, 지도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면 어머님들의 눈이 반짝거렸습니다. '오! 뭔가 신선한데, 그래 나는 이런 미술을 원했어!' 이런 느낌이었달까요? 아이들을 만나며 경험은 쌓이고 지식은 한계를 드러냈어요.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수록 확인되는 지식의 바닥이 다시 '선무당이 사람 잡지 않겠나?' 불안을 일으켰습니다. '뭔가를 더 해야 한다. 나아가야 한다.'책임감이 들게 했어요.


아동심리 단기프로그램에서 평생교육원 과정으로 다시 미술치료 대학원으로 그렇게 배움의 과정은 이어져 갔습니다. '요정도면 되겠지'하다가 한 방 먹고 '이쯤 하면 어느 정도 안 되겠나?' 하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간들이었어요. 사연 많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결핍 내면에 크지 못한 아이의 모습으로 지금을 살고 있었습니다. 사랑과 인정에 목매달고 괜찮은 척 살지만 수시로 '죽음'을 떠올리는 감정의 칼 춤을 추었지요. 그 아이를 키워내야 했어요. 시의 저는 미술선생님, 치료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였기에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거든요. 자신이 괴물처럼 느껴지는데 아이까지 똑같이 길을 걸어 나 같은 사람을 하나 더 만든다는 것은 30미터 해일 앞에 숨도 쉬지 못하며 떨고만 있는 공포였으니까요. 죽기 살기로 개인분석을 받고 상담세미나와 워크숍을 쑤시고 다니며 다양한 케이스의 사람들을 공부했어요. 이론과 케이스에 나를 빗대어 보며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이해하며 조금씩 키워갔지요. 그렇게 같은 계절을 두 번 정도 보내고 나니 중2 열병을 막 보낸 중3정도의 상태?로 삶 속에 서있을 수 있게 됐습니다. 사춘기 열병을 보낸 청소년의 마음엔 제법 힘이 있었습니다. 건강한 거리를 갖고 다른 것들을 보게 되기 시작했으니요.


홀로 서는 것이 가능해질수록 내가 하는 일에서 선택과 집중도 가능해졌습니다. 전에는 '심리미술, 미술치료'가 마치 불로장생의 명약처럼 여겨져 현실의 한계와 이상향의 방대함 사이에서 갈팡질팡 했거든요. 포기할 것과 취할 것이 나니 방황이 줄고 안정감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아이들과 '미술'이란 도구로 마음을 살피고 정서를 돌보는 일을 계속해나갔어요. 변함없이 계속 흐를 것만 같던 날들에 STOP을 만든 일이 있기 전까지요.


제 삶을 다시 돌아보고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던 일. 가슴이 아픈 일. 지금도 한편에서 진행 중인 그 일이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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