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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토 Jan 26. 2021

씨 뷰와 마운틴 뷰

다시 찾은 제주


 술, 담배의 장기 복용에도 불구하고 치유되지 않던 월요병은 기적처럼 완치되었지만 덧나지 않고 말끔히 치료되려면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듯 어디론가 여행을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 졌다.

비수기라 저렴한 비용으로 항공권을 예약했지만 평일 아침인데도 제주행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부자 아빠, 부자 엄마로 보이는 컬러풀한 골프복을 입은 중년 남녀, 검정 롱 코트와 귀걸이로 멋을 낸 훤칠한 청년들, 세련된 화장과 명품 로고가 박힌 핸드백을 멘 아가씨들, 빨간색 커플 스웨터를 입은 채 손을 꼭 잡고 있는 신혼부부. 얼굴에 여드름이 남아 있는 어린 군인들로 빈 좌석이 없었다.      


 섬에 가게 되면 영화 건축학개론에 나오는 서현의 집 같은 sea View에 머물면서 인증샷을 올려야 제주에 다녀왔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용하고 한적 한 걸 좋아한다면 한라산이나 오름, 골프장이 내려 다 보이는 Mountain view를 선호하는데 효리네 민박처럼 노천탕과 콩 농사를 지을 정도의 넓은 정원을 가진 집은 여전히 비쌌다. 제주의 명동이라고 하는 연동에 레지던스를 예약했다.

사드 때문에 어퍼컷을 맞고, 코로나로 복부를 강타당한 연동은 민방위 훈련처럼 텅 비어 있었다. 비행기를 함께 타고 온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화장품, 옷가게, 카페, 식당들로 붐벼야 할 거리에는 휴업, 임대문의라고 적힌 빛바랜 종이가 붙어 있었다.     


아침이면 숙소 앞 카페에서 매일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여행 마지막 날 마스크를 쓴 주인에게 “제주에서 한달살이 하려면 어디가 좋을 까요?” 하고 물었다.

“ 시내!”

 바닷가는 경치는 좋지만 바람과 태풍 때문에 춥고, 중산간은 조용하지만 병원에 가거나 생필품을 사려면 차를 타고 나와야 하니 생활비가 더 든다고 했다.

한 달에  보통 열흘 정도 비가 오고 폭설이라도 내리면 중산간 마을은 고립되는 일도 생기는데 좋은 경치와 한적함도 하루 이틀이지 살다 보면 사람 사는 곳이 그립다고 한다. 열 살만 젊었으면 무시하고 들었을 충고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문만 열면 환상적인 씨뷰를 자랑하는 어촌의 낡은 구옥들은 해마다 찾아오는 태풍과 세찬 바람을 견뎌내기 위해 돌담으로 바다를 가리고 방풍목인 동백나무로 집 둘레를 감싼다.

큰 창이 바다를 향한 집들은 거의 관광객을 위한 펜션이거나 섬으로 이주한 외지인을 위한 집이었다. 원주민에게는 창 너머로 일출과 일몰을 보는 것보다 태풍에 지붕이 날라 가지 않고 추운 겨울날 난방비를 줄이는 일이 더 중요했다.       


걷다 보면 해안가 마을에는 용천수라고 불리는 일종의 우물이 있다. 물이 귀했던 제주에 지하수가 땅으로 용출되는 곳인데 오래된 해변 마을은 대부분 이 물을 따라 모여든 사람들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바다에도 주인이 있었다. 어촌계 허가 없이 수산물 채취를 금지하고 위반 시 과태료가 있다는 경고문이 해안도로를 따라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해녀는 엄격한 교육과 해당 어촌계의 동의하에 일을 할 수 있었고 잠수만 잘한다고 다이빙 슈트를 입고 전복을 건져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메밀이나 콩 귤나무를 키울 땅이 없던 사람들은 바다가 그들의 밭이었다. 여자는 물질로 전복과 소라를 잡고 톳과 미역을 채취하고 남자는 빈약한 목선에 목숨을  의지한 채  험한 바다로 나갔었다.  

방송에 나온 물질 경력 40년이라는 할머니 해녀와 어부 들은 바다에 나오면 아프던  다리도 낫고 답답한 마음도 뻥 뚫린다고 주름이 깊게 파인 입가에 미소를 지었지만  인터뷰 말미에는 한마디 덧 붙였다. “용돈도 벌고”.

아무리 좋아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어도 그 취미가 일이 되기 시작하면 힘들고 하기 싫어진다.

밥을 해결하고, 전복과 소라를 팔아 아이들을 키울 수 없었다면 몇십 년 동안 목숨을 걸고 추운 바다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  

차가운 바다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텃밭에서 채소를 따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졸음을 참으며 구멍 난 양말을 기웠을 것이다.

제주 해녀는 원더우먼이었다.      


 몇 년 전 제주 해변가 게스트하우스에 묵은 적이 있었다. 숙소 앞에는 창고 벽이 반은  허물어져 있고 칠이 벗겨진 함석지붕과 거친 바람을 막기에는 엉성한 알루미늄 창을 가진 구옥이 있었다. 햇살에 널어놓은 빨래가 없어서 빈집인 줄 알았는데 저녁 먹고 나와 보니 불빛이 아른거리고 할머니의 기침 소리가 돌담을 넘어 들려왔다.   

이번 여행에 다시 가보니 그 집은 커다란 간판을 내건 햄버거 가게의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하나 허 번호판의 흰색 차들이 줄줄이 들어오고 긴 코트와 멋진 가방을 멘 젊은 남녀들이 할머니의 집터에서 나와 가게로 들어가고 있었다.

대형 매장과 해시태그가 달린 수많은 카페들이 녹조처럼 해녀의 마을을 하나씩 점령하자 서울의 번잡함이 싫어 제주에 왔다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장은  조용히 간판을 내리고 중산간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방송이 만든 귀농 귀촌 귀어에 대한 정보는 도시인에게 환상을 심어 주는지도 모른다. 일 년 내내 바다에서 갓 잡은 생선과 텃밭에서 딴 신선한 야채와 나물을 먹고, 공기 좋고 풍광이 수려한 곳에서 아침을 맞는 영상 뒤에는 도시와 마찬 가지로 먹고살기 위한 치열한 몸짓이 있었다.

 전복이나 뿔소라를 바다에서 건질 재주도 없고 잡초와 냉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여행자는  24시간 불을 밝히는 해장국 집과 편의점에  이미  길들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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