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쓴 딸의 교환학생 체험기
추석 연휴에 놀러 가겠다고 딸에게 말했지만 교통비와 숙박비가 만만치 않고 이동 시간도 길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려 딸이 공부하는 곳까지 열차로 다섯 시간이나 간 다음 베를린, 프라하, 잘츠부르크를 거쳐 다시 독일로 돌아오는 일정이니 나흘은 길에다 버리는 셈이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도 둘이 나가는 것보다 하나가 들어오는 게 이득이라 딸에게 당근을 던졌다.
"추석이니 차라리 네가 오는 게 어때? 나갈 때 핸드백 좋은 거 사줄게!"
이렇게 꼬셨지만 귀차니스트인 딸은 모든 예약과 일정을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여권과 신용카드만 잘 챙겨서 오라 한다. 아내 역시 온갖 먹거리와 딸의 겨울옷이 담긴 여행가방이 두 개나 되는데 혼자라도 가겠다고 우겼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다녀와서 두고두고 원망할 게 뻔하니 짐꾼이 되어 여행을 떠났다.
전에는 열두 시간이면 도착한 걸로 기억하는데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인지 두 시간이나 더 걸렸다. 긴 비행에 지쳐 초췌한 얼굴로 입국장을 빠져나오니 마중 나온 아이가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안아 줬다. 코로나에 걸리기도 하고 비자가 늦게 나와 마음고생 많았는데 생각보다 건강해 보여 다행이었다. 칠 개월 만에 다시 만난 가족은 나란히 걸으며 아이가 다니는 학교와 도서관을 둘러보고 아침이면 공원을 산책한 후 딸이 단골로 간다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늙어 가는 부모는 지도를 손에 든 딸의 뒤를 이주동안 졸졸 따라다녔다. 어디를 가던, 무엇을 하던, 뭘 먹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쟁 피해 도망 나온 난민처럼 한방에서 세 식구가 자야 했지만 즐거웠다.
비혼이나 결혼해도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가정, 엄마나 아빠 혼자서 자녀를 양육하거나 두 가족이 하나가 되기도 하니 가족에 대한 정의도 변하고 있지만 결혼이라는 법률적 정의나 공통의 유전자를 나눠가진 혈연관계를 넘어 가족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연결시키는 운명의 동아줄이었다. 때론 부모로서 짊어져야 할 의무와 책임이 무겁고 힘들어도 잠든 자식의 얼굴을 쓰다듬은 후 고된 일과를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용기. 늙어가는 부모의 흰머리와 주름살을 보면서 부모가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연민의 정이 깊어지는 것은 가족이라는 배움의 터전이었다.
딸을 보고 왔더니 밀린 숙제 마친 것처럼 홀가분했는데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코로나에 걸렸다. 다음날 라면, 과자, 비타민음료가 잔뜩 담긴 박스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유럽 가서 이주나 싸 돌아다녔으니 칠일동안 방구석에 가만히 있으라고 구청에서 보낸 것이다. 박스 안에 담긴 인스턴트 설렁탕을 데워 밥을 말아먹고 있는데 아이에게 톡이 왔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추석 때 한국 갈 걸 그랬어!. 외할머니가 해준 나물이 너무 먹고 싶어”
부모 말 들어서 손해 볼 게 없다는 걸 딸이 좀 알아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