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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토 May 26. 2024

만나면 나쁜 친구

지란지교를 그리워하며

고등학생 때,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필사해 친구들에게 나눠 준 적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자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열어 볼 수 있고… 나의 변덕과 흥분에도 적절하게 맞장구 쳐주고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 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일생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시인은 죽어서도 기억되는 이상적인 우정을 노래했는데 나에게도 이런 친구가 한 명쯤 있기를 바랐다. 진실한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다는 금언을 믿었으며, 진학이나 우정, 이성에 대한 호기심, 가정 불화 따위의 고민은 부모나 형제보다 하루종일 붙어 있는 친구들에게 터 놓곤 했다.


젊은 날의 우정이 영원할 줄 알았지만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지란지교를 꿈꾸던 친구들은 하나둘씩 뿔뿔이 흩어졌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모임은 유지되지만 중년이 되자 늘어진 테이프를 틀어 놓은 것처럼 대화는 점점 지루해졌다. 서로의 생사(직장에서의 은퇴)와 부모님의 안위, 자식의 진학이나 취직을 걱정하다가 어디가 아프다고 각자의 병명을 나열하다 보면 모임은 끝이다. 내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지지만 돌아서는 그림자는 무겁고 길기만 하다.

 이호선 교수의 < 오십의 기술>에선 중년의 고독과 갱년기를 이겨내는 기술로 친구와 사람들과의 교류를 강조하지만 늘 같은 얘기만 되풀이하는 모임이 피곤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지기 시작했는데 신문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70대 이상 고령자 4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난초 같은 친구가 아니었다. 친구라고 응답한 사람은 겨우 6%에 지나지 않았으며, 배우자가 80%로 압도적 1위였다. 남편이 실직했다고 친구들이 생활비를 매달 부쳐줄 것도 아니고, 병원에 입원했다고 매일 병간호를 해줄 것도 아니다. 지난한 삶을 끝까지 동행하는 건 친구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다.

인생 선배들이 친구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니 살생부를 만들어 친구를 정리해 보기로 했다. 가는 길이 너무 달라 공통된 화제가 없는 친구, 만날 때마다 하소연만 해서 우울을 전염시키는 친구, 돈 자랑, 자식 자랑 하는 놈, 약속 시간에 늘 늦거나 자기 말만 늘어놓는 인간.. 이런 식으로 지워 나가다 보니 내 장례식에 와줄 친구가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몽땅 뽑아 버릴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향기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궁리해 봤다.


 시인 류시화는 우리 모두는 자기 인생의 작가이며 , 독자가 작가에게 기대하는 건 새롭고, 재미있고, 의미가 있거나 깨달음이 있는 이야기라고 한다. 내가 그들의 얘기를 지루해하듯 , 나의 과장된 추억과 비루한 경험이 술자리를 이어 나가는 라테였다.

난초는 아무 데서나 꽃을 피우지 않는다.

잃어버린 호기심을 되찾고, 재미난 일들을 채집하고 나누며, 세파에 찌든 후각을 되살린 다음, 난초의 향기가 다시 피어나는 우정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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