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건방지게도 내가 원하는 건 노력해서 이룰 수 있다고 믿어왔다.
원했지만 끝내 할 수 없었던 것. 그건 내가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며 다시 대학원을 택했을 때 원했던, 교수라는 직업이다.
석사를 마치고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동기들처럼 GRE 공부를 하지도 않았고 원서도 넣어볼 생각을 안 했다. 박사과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꾸역꾸역 해야만 하는 영어가 싫었다. 그 시기에 참 우스꽝스럽게도 영어가 더 편한 남자와 연애를 했다. 미국으로 다시 갈 사람인데 어쩌다 보니 같이 미래를 계획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내가 누군가를 바라보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 같다.
조금 일찍 독립적인 생활을 해왔던 나인데, 정작 20대 후반의 나는 그냥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고, 미국이 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남편의 공부가 끝나고 정착할 때쯤이면 나도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만 막연히 했다. 하지만 삶이 내가 예상했던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건 아니더라.
나는 계획형의 사람인데 그 계획이 지켜지고 안 지켜지고를 떠나서 빨리 세워지지 않을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 결혼 생활의 시작은 남편의 학업 계획으로 움직여졌고 이후에도 계속 마찬가지였다. 타국에서 나는 단지 유학생의 와이프일 뿐, 사회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어떤 위치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저 그의 삶의 방향대로 함께 흘러갔다. 물론 물리적인 거리 때문에, 보통의 신혼부부들이 갖는 양가 가정에서의 의무감에서는 좀 벗어나 있었기에 우리는 정말 우리 둘만 바라보며 연애할 때와 다름없이 재미나게 지냈다.
하지만 이따금 한 번씩 내가 내 미래를 계획할 수도 없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는 것에 한 번씩 화가 올라왔고 답답했다. 돌이켜보니 그때의 나는 모든 걸 남편에게 의지했다. 하기 어려운 이유들, 안 되는 이유들만을 생각하면서 내가 주체적으로 무언갈 계획하지도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냥 표면적으로 안 되는 이유들을 놓고 속상해하면서 남편의 미래를 기다리기만 했던 것 같다. 최근 1년 안에? 정말 낱낱이 내가 그랬구나 깨닫고 남편에게 당신도 힘들었겠구나 하며 사과했다(양심이 살아있는 여자임 ㅋㅋ).
의미 없이 형식적으로 일을 해내야 할 때 힘이 든다. 공공기관 프로젝트에서 그런 경험을 했다. 계획은 다른 팀에서 세워 채택이 되었고, 실행 부서는 달라 여기선 그냥 닥치고 해내야 하는 상황. 이상해도 일단 어떻게든 기간 채워 보고서에 쓸 것 정도는 남겨야 하는 상황. 물론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도 어느 정도 자신은 있지만, 일단 과정 진행 중에는 업무의 큰 틀을 수정할 권한도 없이 그냥 출퇴근 도장만 찍는 일은 나에게 무의미하다.
현재의 일 역시 수요와 공급 그 사이에서 조율하고 매칭하는 일이 계획형 인간인 나에게는 피로도가 높은 일이 되는 것 같다. 물론 계획대로 판이 짜여질 때는 희열을 느끼지만, 어느 하나에서 삐걱거리면 연관된 것들이 같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일의 속성상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내가 몹시 계획형 인간이라 그런 건가 생각해 보면, 사실 나는 내 계획과 실행에 있어서는 매우 유연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다^^;; 다만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성과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조율하는 스타일이다 보니(개별화 강점을 가지고 있는 나)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고 피곤해서 그런 품을 좀 줄이고도 싶은데 쉽지가 않다. 이 일을 계속 끌고 가는 게 맞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한다.
사람들을 대면하는 일을 그다지 즐기지는 않지만서도, 사람을 대하는 일이 나에게 특별히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내가 좀 더 쉽고 편하게 하는 일인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이걸로 인해 번아웃이 오는 것도 맞는 것 같다. 병원에서 다양한 문제를 지닌 클라이언트를 만날 때에도, 어느 순간에는 내가 기계적으로 상담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회의가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몸이 부서져도 혼자 하는 일이 편하다. 남에게 싫은 소리, 특히 부탁 같은 건 하기 싫고 아쉬운 소리도 질색이다. 공동작업할 때 누군가는 대충 해서 퀄리티를 떨어뜨리는 것도 싫고, 그래서 다시 내가 메꿀 바에야 혼자 해서 완성도를 높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여태까지 살면서 솔직히 누군가를 막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그런 생각도 거의 해보질 않은 것 같다. 나에겐 그런 불타는 에너지가 부족하다^^;; 다양한 사람들을 알아가는 건 참 즐겁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만났을 때의 신기함, 그리고 그 사람의 생각을 알아가는 것도 재미나다(우리 남편 ㅋㅋ).
내가 가지고 싶은 면을 지닌 사람, 그런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대화할 수 있을 때 참으로 행복하다.
특히 문화예술 분야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을 동경한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고 했던가. 어릴 적 꿈이 화가였던 나에게 미술 전공자들은 왠지 더 대단해 보이고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들이다. 작은 공통점이라도 찾고 싶고, 내 안의 예술혼을 끌어올려 뭔가를 더 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악기는 오직 피아노만 칠 줄 알았지만 중학교 때 학급 반주자를 했던 경험은, 나에게 이것 역시 나의 능력 같은 걸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할 줄 아는 유일한 악기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음). 그래도 국민학교 시절 오랫동안 다닌 피아노 학원이 내게 준 선물이랄까? 다시 취미로 악기 하나쯤 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도록 하고 있고, 딸이 현악기 배울 때 나도 같이 배워보고 싶은 로망이 있다:)
도전이라는 말이 뭔가 성공적인 결과를 같이 가져와야 할 것만 같아 조금 망설여지기는 한다.
나는 다시 내 이름 석 자로 사회에서 인정해 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10년의 공백을 깨고 재취업을 하기도 했고, 두 번의 직장을 거쳐 현재는 사업자를 내고 일을 시작한 지 1년 3개월이 지났다.
나는 솔직히 취미부자 생활을 꿈꾼다. 이전 글에서 말했든 과정을 즐기는 한량 체질 ㅎㅎ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중에 무얼 해야 돼?라는 무수한 질문 끝에 지금의 내 생각은 이렇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잘하는 일)로 돈을 벌고, 좋아하는 건 순수한 목적 그대로 취미로 즐긴다. 솔직히 나는, 뒷심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좋아하던 공부로 끝장을 못 본 것도 그렇고, 좋아하는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온라인에서 본 많은 이들이 말하듯, 예를 들면 매일 그림 한 장씩 그렸더니 그게 기록이 되고 경력이 되고 다른 커리어를 불러오고 수익화가 되며 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건 정말 꿈같은 이상적인 일이지만, 솔직히 나에겐 그만큼의 재능과 열정도 부족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어쩌면 더 쉽게 가는 길이 있다. 지금의 내 능력이나 경력, 자격증 같은 걸 활용해서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맞는가 보다.
사실 나는 이상적인 모습만 그리며 쫓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지만, 경제력과 함께 삶의 주도권을 놓아버린 10년 동안 나는 혼자 작은 결정을 내리는 것조차 몹시 힘들어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특히나 냉정한 판단을 요구할 때면 우리 남편 의견을 꼭 들어본다. 나와 다른 면에서 강점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 정신을 차릴 때 도움이 된다. 너무 현실적이라 인간미가 떨어질 때는 있지만^^;;
마음이 어려워질 때, 나는 자꾸 더 내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애쓴다. 그리고 스스로 달래는 데에도 익숙하다.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는 아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저 위로가 되기도 한다. 내가 무언가를 더 잘하고 싶게 만드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지게 만드는 동력.
남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반면 사실 친한 친구들에게도 속마음을 많이 털어놓지는 않는 편이다. 그냥 묵묵히 나 혼자 해결하는 게 대부분이고, 아니면 어느 정도 해소가 된 다음에서야 가볍게 얘기하고 넘어가는데 그조차도 아주 가끔이다.
하지만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 있을 때 한 번씩 남편에게 어리광을 부리게 된다(내가 연장자임 주의 ㅋㅋ). "지금 내 마음이 몹시 찜찜하고 불편한데 그게 뭐 때문인지 정확히 모르겠어." 혹은 "나 지금 소리 지르고 싶어, 꺅 ㅋㅋ" 이런 식이다. 내 기분 상태를 알리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언제나 이런 내 모습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우직한 남편의 모습을 볼 때면 위로가 되고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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