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김진서
일요일 오후, 진서는 홀로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그는 또래 남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피시방에 가거나 축구공을 차거나 하는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런 것들이 자신과는 아예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진서는 피시방에 가서 담배 냄새를 맡거나 한낮에 땀 흘리며 축구공을 좀 차는 게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요즘 들어 부쩍 했다. 특히 운동이 그랬다. 진서는 티브이에서 나오는 근육질의 남성들을 보고서 이제껏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도 그런 멋진 남성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말이다. 그러나 이제 후회해도 늦었다. 그의 학창 시절이 앞으로 하계방학을 지나서 약 육 개월 후면 모두 끝이 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방학의 캠퍼스엔 외부인이 많이 들어와서 산책을 즐겼다. 특히 유모차를 끌고 유유히 돌아다니는 젊은 부부가 많았다. 진서는 그들을 내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심술이 나는 것이다. 무엇에 대한 심술일까? 그것은 진서 자신조차도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그리고 평화로운 광경 앞에서 그렇게 심술을 내는 스스로가 참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태양이 뜨거웠다. 캠퍼스 곳곳에 심어진 수목들 어딘가에서 매미가 울었다. 진서는 이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바람을 쐬면 좀 나을 것이다. 그는 고학년답게 이 학교의 어디를 가면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엔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머리에 떠오른 곳과는 정반대의, 태양이 광활하게 내리꽂히는 대운동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과연 사람이 없었다. 입구 볼라드 옆에 쭈그려 앉은 외부인 한 명을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외부인은 교복을 입고 있었고 운동장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진서는 외부인의 뒤에 서 있어서 그녀의 등과 뒤통수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그녀가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진서는 그녀의 체구를 보고 중학생일 것이라 짐작했다. 몇 걸음 더 다가가니 그녀의 하얀 교복 위로 울퉁불퉁한 끈의 실루엣이 보였다. 저게 브래지어겠거니 생각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눈에 보이는 것과 떠오르는 것이 무작위로 혼재했다. 그는 여자아이들이 일찍부터,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부터 브래지어를 차던 것을 떠올렸다. 또 수업 시간에 갑자기 뛰쳐나가던 여자애들도 떠올랐는데 그럴 때마다 남자애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해야 했다. 여자애들은 남자애들보다 몸의 성장이 빨랐다. 그래서 그걸 알아차린 남자애들은 쉽게 부끄러워했고, 또 그걸 알아차린 여자애들은 그걸로 남자애들을 놀려먹었다. 진서 또한 곤란했던 기억이 있었다. 여자애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남자 화장실에 들어왔고…. 진서의 생각은 여기서 멈췄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기 때문에 그가 일부러 끊은 것이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보면 태양 때문에 찡그렸다고 생각하리라.
그때 소녀가 뒤를 돌아봤다. 진서의 불쾌한 표정을 그녀는 분명 보았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소녀의 눈길은 자신의 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단지 확인만 한 듯 순식간에 다시 운동장 쪽을 향했다. 딱히 뒤의 사람을 기분 나쁘게 흘겨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진서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도 그럴 게 짓누르는 태양 때문에 소녀의 미간 또한 찡그려진 채였기 때문이다. 진서는 약간 당황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뒷걸음질 쳤다. 너무 더워서 발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할지,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대운동장에 무슨 목적이 있어서 온 건 아니니까 말이다. 그는 그저 사람을 피해 왔을 뿐이다. 사람을 피해 왔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니 눈앞의 이 소녀 역시 사람을 피해 이곳에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서는 다시 한번 외부인을 살폈다. 소녀의 뒷모습은 너무 말라서 조금 처량해 보였고, 아무런 웨이브를 넣지 않고 어깨 위까지 자른 단발머리는 모질이 좋지 않아 보였다. 아주 평범한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서는 어쩌면 자신이 이 소녀에게 말을 걸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멍하게 그녀의 검은 뒤통수를 응시했다. 새까만 머리가 태양 빛을 한껏 머금고 있었다. 엄청 뜨거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바람이 조금 불어왔다. 소녀의 머리칼이 흩날렸고 그 모습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풍에 깨어나기라도 한 듯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서는 이번에는 진짜 뒷걸음질을 쳤다. 정신이 조금 들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소녀는 쭈뼛거리며 진서 쪽을 몇 번 흘깃거렸는데, 뜻밖에도 그녀가 진서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기숙사가 어디예요?”
“저쪽...”
진서는 멀리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녀는 그쪽을 넘어다봤고, 진서는 소녀의 교복 셔츠에 오바로크 되어있는 명찰을 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진서의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