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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인 Mar 01. 2023

빨강머리 앤과 엄마가 된다는 것

@ PEI 그린 게이블스


소설 '빨강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 캐나다 최고의 문학 수출품이라는 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단행본으로 5천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다른 캐나다 문학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데다, 대단한 팬이 아닌 나도 원작 소설, 애니메이션, 그리고 넷플릭스 드라마까지 섭렵했으니. 덩달아 작품의 배경인 Prince Edward Island(PEI) 역시 효자 관광상품이 되어 해마다 백만명 이상의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캐번디시의 초록 지붕의 집


섬의 북부에 있는 시골 마을, 캐번디시(Canvendish)는 원작자인 몽고메리가 자란 곳이자 작중 애번리 마을의 모델로 소설과 관련된 여행상품이 빼곡해 앤을 참말로 징글하게 우려먹고 팬들을 설레게 한다. 대표적인 곳은 Green Gables Heritage Place로, 원래 몽고메리의 친척이 살았던 곳인데, 캐나다 정부가 이 일대를 국립공원 및 사적지로 지정한 후 집을 소설에 묘사된 방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입장권 스티커를 가슴팍에 붙이고 먼저 작가의 삶과 소설을 소개하는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다음으로 헛간을 통과하니 안뜰에 매튜가 타던 마차가 있고, 그 뒤로 앤이 '눈의 여왕(Snow Queen)'이라고 부른 벚나무, 그리고 드디어 초록 지붕의 2층 집이 나왔다. 집 안 구석구석에는 소설 속 19세기말 공간들이 실감나게 재현되어 있는데, 얼마 전 넷플릭스를 몰아 본 터라 에피소드가 꽤 쉽게 소환되었다. 마릴라의 재봉틀이나 앤의 퍼프소매 원피스 같은 소품을 가리키며, '아, 저거는 그때 그거야!' 하며 기억력을 자랑해 본다. 


 더 낭만을 즐기고 싶었지만 8월 말은 방문자들로 붐벼서 다소 쫓기듯 구경하다 밖으로 나왔다. 집 앞뒤로 뻗은 산책로, '유령의 숲(Haunted Woods)''연인의 오솔길(Lovers' Lane)' 걸어봤다. 산책로 끝에는 골프장이 나오는데 한 때 그린 게이블스를 이곳의 클럽하우스로 쓰려고 했다가 사람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문화유적 앞에서도 이익에 급급한 자들은 만국 공통으로 존재하나보다.


셀프투어 후에 기프트샵에 발길이 닿는 것은 인지상정, 불인지사다. 앙증맞은 기념품을 구경하느라 가게를 몇 바퀴는 돈 것 같다. 밀짚모자를 쓴 앤 봉제인형, 다이애나의 라즈베리 주스 같은 소품을 보노라면 앤티크, 빈티지, 아기자기함에 미치는 나는 정말 미쳐서 어느새 계산대 앞에 선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 방문을 마무리하게 된다.

아기자기해



빨강머리 앤이 그렇게 대단한 작품이야?


라고 아들이 물었다. 앤의 흔적으로 가득한 캐번디시를 돌아다니다보면 어련히 나올 만한 질문이다. 글쎄, 고전이란 뭘까. '긴 세월에 걸쳐 가치가 검증되고, 계속 재해석되면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작품'이라고 정의되어 있는데...


이 소설은 1908년에 출간된 후 여전히 끊임없이 각색되며 사랑받고 있다. 이토록 재탄생을 거듭하는 데는 시대를 관통하는 확장성 높은 스토리 덕분일 것이다. 원작은 사랑이나 우정 같은 보편적 가치 외에도 여성의 교육이나 정치 참여 등 당시로서는 꽤 진보적인 주제도 다루었다. 기존에도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성격이었던 앤은 넷플릭스 드라마(Anne with an E)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페미니스트로 설정되고, 원작에 없는 캐릭터인 원주민, 흑인, 동성애자 등 마이너리티 연대하는 인물로 성장한다. (원작의 백인중심 세계관보다 캐나다의 다양성을 보다 진실하게 드러내고 싶었다고 한다. 다만 이런 각색은 호불호가 꽤 갈렸는지 방영 당시 'not my anne' 해시태그도 유행했다나. 나도 간혹 주객전도의 느낌을 받았다...)


이 정도면 빨강머리 앤도 클래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어머니가 된다


나에게 필요한 고전이란 아직도 성장이 필요한 어른을 위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빨강머리 앤은 근대에서 현대로 매끄럽게 넘어와 지금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어린 시절에는 앤만 보였지만 엄마가 된 지금은 마릴라에게 더 마음이 간다. 처음에는 입양을 꺼렸던 마릴라가 양육자로서 성장하며 진짜 부모가 되고, 어른이 된 앤과 서로 의지하게 되는 과정은 정말 뭉클하다.


며칠 전, 아이를 낳은 게 제일 잘한 일인 거 같다는 누군가의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아이를 낳은  잘한 일일까? 애초에 임신계획양가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의무감으로부터 출발했다. 출산 후에는 내가 가진 엄마 그릇이 너무 작다는 자괴감, 이 세상은 너무 험하다는 불안감이 쌓여 애들한테 미안할 때가 많았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낳아줘서 고맙다고 하는 아이들의 고백이 늘 과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기적인 나는 나의 평온을 위해 조금 더 좋은 엄마가 되려고,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소박한 노력을 하려고 마음 먹는다. 비록 매일 밤 자책하고 다짐하고 다음 날 아침 바로 무너지길 반복하지만, 나도 가끔은 작은 성공을 만들어낼 때가 있다. 아이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빚져 천천히 엄마가 되어 가는 중이다.


나는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고, 그래서 끔찍하게 엉망으로 만들겠지만, 최선을 다할 거예요. 

과수원에서 여름 사과를 한 광주리 따고 있을 때... 순간 가슴을 찌르는 듯한 갑작스러운 공포 속에서 마릴라는 앤이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앤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긴 했다. 아니 앤을 몹시 좋아했다. 그러나 이제 비탈길을 뛰어내려 가며 알게 되었다. 지구상 다른 어떤 것보다 앤이 그녀에게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에겐 서로가 있어 앤, 네가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너에게 엄격하고 가혹할 때도 있었지만... 네가 그린 게이블스에 온 이후 늘 너를 내 살과 피처럼 사랑했어. 너는 늘 나의 기쁨과 안식이었단다.


매튜 얘기를 빼먹으면 섭섭할까. 매튜는 앤의 대입 합격자 발표가 교육감 때문에 늦어진다는 말에 종교와도 같았던 보수당을 버리고 자유당에 투표하려 한다. 자식일이 끼어있어도 사람이 정치성향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고독한 소녀 몽고메리를 지켜준 것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여성 최초 캐나다 작가 협회 회원, 반전 운동가이자 여권 신장 운동가, L.M. Montgomery. 몽고메리는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약물 과다복용으로 생을 마감하며 개인으로서는 무척 불안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몽고메리의 전기를 읽어 보면 그녀의 쓸쓸했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몽고메리가 21개월 아기일 때 어머니는 폐렴으로 죽었고, 조부모의 손에 길러졌으나 그들은 다소 냉정한 성격인데다 7살에는 아버지마저 먼 서스캐처원으로 떠났다고 한다. 어린 시절 몽고메리는 친구 집에서 며칠 지낸 적 있는데, 그때 친구의 어머니가 친구에게 "My dear little child"이라고 부르는 것을 잠결에 들은 것을 잊지 못하고 일기에 썼다. 그런 다정한 인사를 들으며 잠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16살이 되어 아버지와 살기 위해 서스캐처원을 찾아가 1년을 함께 살았지만, 새엄마와 사이가 나빴고 아버지도 무심했기에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결국 다시 PEI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데, 캐나다 중부에서 동부로 대륙을 횡단하기 위해서는 9일 동안 몇 번이나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고 한다. 미성년자인 딸이 홀로 그 긴 여행을 견디도록 내버려 둔 아버지. 몽고메리는 기차역에서 혼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린 몽고메리가 외로움에 대처한 방법은 "상상 속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 그리고 "PEI의 대자연"이었다고 한다. PEI는 붉은 사구 해변과 끝없이 늘어선 감자밭의 그림같은 풍경으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PEI의 자연을 보며 자기만의 애칭을 붙이지 않고는 못배긴 앤의 모습은 몽고메리와 닮아 있다. 몽고메리는 평화로운 섬을 혼자 걷거나 대서양을 바라보며 종종 'the flash'라고 일컫는, 모든 것이 평온해지고 명료해지는 섬광같은 순간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앤의 이야기는 자연이 주는 감동, 가족 간의 사랑과 우정에 대한 찬사로 가득 채워진 것이다.


PEI 의 표어는 라틴어 "Parva sub ingenti""위대한 자에 의해 보호받는 작은 것"이라는 뜻이다. 대자연으로부터 선물 받은 무한한 상상력이 정한이 많았던 작은 소녀를 지켜준 가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 몽고메리의 삶은 Rubio의 전기를 참고, 요약(Lucy Maud Montgomery: the gift of wings)

Prince Edward I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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