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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인 Mar 02. 2023

그 자서전을 읽다가 덮은 이유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한 교수의 자서전을 읽다가 불편한 마음이 차올라 읽기를 중단했다. 이 글은 책 리뷰가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지질한 고백이 되겠다.


책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므로 저자와 책 제목을 밝힌다. 한국계 미국인 석지영 교수의 자전적 에세이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토론토 도서관의 한국어 서가에 꽂힌 이 책을 1년 동안 제목만 쳐다보다, 지난 주말 문득 호기심이 생겨 빌려왔다. 석지영 교수는 아시아여성 최초로 하버드법대 종신교수가 되어 '자랑스러운 한국인' 상을 받은 인물이다. 덧표지에 적힌 이력이 화려하다. 그리고 독특했다. 발레와 피아노를 진지하게 배운 법학교수라니.


책은 네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 이민 초기의 <낯선 곳에서 뿌리내리기>, 중고등 시절 <고통과 탐색의 시간>, 대학 시절의 <자유를 향하여>, 법대 교수 시절의 <하버드에서>.


책 초반부터 응?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친가는 평양의 지주 집안이었는데 해방 직후 공산당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울로 피난을 왔다. 외가는 서울에서 버스사업을 했는데 집에 늘 고용인이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외제 랜드로버 차로 등하교를 할 정도로 부자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빈곤에 허덕이던 해방 전후에 드문 재력가 집안었다는 것에 1차로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부자가 죄는 아니다. 계속 읽었다. 그의 부모는 중학교 입시 과외 모임에서 처음 만나 각각 의사와 약사가 되고 결혼하여 를 낳는다. 군사독재 하의 냉혹한 한국의 현실을 대하고 이민을 결심한다. 당시 이민자의 상당수가 엘리트였다고 한다. 저자는 이민 후 김치 냄새가 역해졌고 한국어 유지를 포기한다. 서울의 사립 유치원에서 뉴욕의 사립학교로 전학 후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발레 레슨을 받았다. 지금이야 이런 사교육은 한국에서도 흔한 편이지만 80년대임을 생각하면 그 부모의 경제력과 교육열이 대단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영재학교 헌터스쿨과 미국최고의 발레학교인 아메리칸발레스쿨에 동시에 합격한다. 훈련 덕분이 아니라 발레에 적합한 체형 덕분이었다. 학업과 발레를 한동안 병행하다가 부모의 반대로 발레를 포기한다. 이때 발레를 계속하지 못한 것을 인생의 가장 큰 회한으로 꼽고 있다. 학업보다 문학에 빠져 지내다, 어머니의 권유로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지원하고 피아노 전공으로 합격한다. 이쯤에서 한인사회의 일반적인 치맛바람과 그의 엄마의 교육관은 다르다는 회고가 나온다. 그가 묘사한 그 학교의 유럽여행은 이렇다. 줄리아드 음악 선생님을 동반하여 낮에는 지중해, 알프스, 마드리드, 바티칸의 풍광을 즐기고 밤에는 오래된 연주장과 중세 교회에서 외국인 청중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 것이다. 이런 세계가 있었다...임윤찬 고 있나. 이 유럽여행 에피소드를 기점으로 나의 반감이 강해졌다. 그의 학창시절은 카네기홀 독주회장에서 베토벤을 연주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피아노는 열심히 쳤지만 공부는 뒷전이어서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예일대 원서를 내보래서 냈더니 덜컥 합격한다. 대학시절에는 부모님의 지원 덕분에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공부를 게을리했다. 그런데 옥스퍼드 대학원 과정에 마셜 장학생으로 또 합격하고 26세에 문학박사 학위까지 따낸다. 그러나 뭔가에 홀린 듯 로스쿨로 진로를 바꾸는데, 그동안의 방대한 독서 덕분에 비교적 편안하게 학교 생활을 한다. 시험을 망쳤다고 생각했는데 A를 받는다...170p... 세 번째 챕터에서 책을 덮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걸 읽고 있었나. 책 추천사에 '가장 힘든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는 말이 있는데, 시장님은 이 책을 정말 읽은 걸까.  


다시 말하지만 책에는 문제가 없다. 태어나자마자 공기처럼 특권을 누리다보면 그게 남에게는 박탈감을 안겨 줄 수 있다는 걸 모를 수 있다. 책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은 독자로서의 나의 한계이기도 하다. 책 제목이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인데, 독자인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는 타국 땅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씨름하며, 주경야독 불굴의 투지로 거듭된 좌절을 이겨내는 7막7장류 공부벌레의 아메리칸드림 월드였나 보다. 책을 사지 않고 도서관에 빌려서 읽은 것이 어린 시절의 결핍이었고, 인생의 가장 큰 좌절이 발레를 그만둔 것인 금수저 엄친딸의 세계 말고. 그런데 내가 영국의 왕족을 부러워한 적이 있나. 아예 다른 세계 사람이라 생각하면 샘이 나지 않는 것을.


책 내용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다  것처럼 말할 수는 없다. 순간 오싹해진다. 누군가 브런치의 내 글을 읽고 나를 오해하지 않을까? 해외에서 여행기나 쓰는 한량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남편의 해외 발령으로 고민 끝에 무급 휴직을 했고, 작년 연휴에 짬짬이 했던 여행들을 아직까지 우려먹고 있을 뿐이다. 귀국 후에는 다시 생계전선에 뛰어들 것이고, 연로한 부모님의 부양 의무도 막중하게 느끼고 있다고 다급하게 해명해본다. 이런 선택에 이를 수 있었던 자체가 큰 기회이고 행운이라는  알면서도 무시한 채.


나는 내가 엄청난 결핍을 갖고 자랐다고 생각해왔는데, 마흔이 넘고 보니 그래도 내 인생에는 사랑과 행운이 더 많았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그럼에도 재능, 근성, 배경 모두 가진 인생을 대할 때의 울적함은 피하기 어렵다.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찾아봤다. 나처럼 이 책이 불편한 사람도 있었지만, 잘 읽었다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멀었다. 꼬인 마음 그대로 책을 반납할 것이다.




2021년 이맘때, 하버드 법대의 마크 램지어 교수가 <태평양 전쟁의 성 계약>이라는 논문을 통해 위안부들이 자발적 선택으로 매춘부가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석지영 교수는 그의 논문과 사료를 자세히 파악한 후 뉴요커 1면에 <위안부의 진실을 찾아서>라는 글을 게재하여 그의 주장에 학문적 근거가 없음을 비판했다. 논문이 철회되지는 않았지만 결국 역사적 합의를 뒤집으려는 저열한 시도에 크게 한 방 먹인 것이다. 뉴요커 게재문(한국어 버전이 있다)을 봤는데 얼마나 잘 썼는지!!! 중립적인 글에서도 지성과 품격, 열정이 느껴진다. 부럽고 짜증난다. 노래나 들을란다.


용서하오 밀리는 파도를

물새에게 물어보리라

물어보리라 몰아치는 비바람을

철새에게 물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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