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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인 Mar 31. 2023

서울 한복판에서 키 작은 아이를 키운다는 것


 작은 게 뭐 대수인가


오늘도 고기 들어간 아침을 먹고 학교에 다녀왔다. 어서 게임을 하기 위해 너무 하기 싫은 줄넘기 800개를 해치우고, 숙제도 이제 끝내려는데 엄마가 우유와 비타민D를 먹었냐고 잔소리를 해서 숙제 흐름이 또 끊긴다. 배가 불러서 저녁을 좀 남기니 엄마가 나를 대역죄인 취급을 한다. 아직 10시도 안 됐고 잠도 안 오는데 엄마가 빨리 자라며 불을 꺼버렸다. 친구들은 더 늦게 자는데, 왜 나만. 6학년인데 4학년이냐고 묻는 애들이 좀 짜증 나긴 하지만, 키 작은 게 뭐 대수인가. 정작 스트레스를 받는 건 엄마 같다.



루저의 난(亂)이 있던 무렵


십몇 년 전 예능프로에서 한 여대생이 "키 작은 사람은 loser!"라고 만천하에 외치자, 졸지에 인생의 패배자가 된 전국 180 이하 네티즌들이 폭동을 일으켜 제작진이 물러나고 프로그램이 개편되는 등 큰 논란이 되었다. 나는 이 '루저의 난'이 일어난 해에 결혼했다. 키가 작아도 키높이 신발에 관심 없는 남편이 좋았다. 결혼식 때 남자 키가 더 커야 사진발이 선다는 말에 하이힐을 못 신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2년 후에 겨울이를 낳았고, 몇 년 후 병원에서 겨울이의 예상키를 듣고 실망했지만, 아빠처럼 자존감 높게 살면 되지 했다. 아니, 나만 최선을 다하면 내 아들을 평균 키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매끼 5대 영양소를 먹이고 가끔은 한약도 지었다. 줄넘기도 열심히 시켜서 겨울이는 모둠발, 발바꿔, 엇갈아를 일찍 마스터했다.

넌 내 아들이니까



말 그대로 정말 아픕니다


1년 전 ESL 수업을 들을 때였다. 우리 반은 정년퇴임을 앞둔 선생님 마그릿과 8개 국적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은 수업 주제가 <Beauty>였다. 뉴욕타임스 기사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오자 나와 중국 학생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올해도 많은 중국인들이 서울로 원정 성형을 갑니다, 한국 성형 관광의 규모는..." 마그릿은 외모에 대한 각 나라의 인식에 대해 얘기해 보자고 했다. 나는 이왕 창피해진 것 평소 보던 일을 얘기했다. "한국의 많은 부모가 자녀가 의학적으로 저신장이 아님에도 더 큰 키에 도달하기 위해 성장호르몬을 맞힙니다. 외모가 경쟁력으로 여겨지고, 부모는 자녀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고... 우리나라는 인적 자원 하나로 지금의 위치에 이르러..." 나의 발언에 모두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잠시 멍해있던 마그릿이 말했다. "아...너무 아픕니다. 아동학대라는 말은 못 하겠어요. 그냥 말 그대로 너무 아프네요"



서울 한복판에서 키 작은 아이를 키운다는 것


내가 때때로 캐나다 이민에 혹하는 건 자연환경도, 교육도 아닌 남과 비교하지 않는 문화 때문이다. 특히 외모의 경우 워낙 다인종 동네라 '평균'이라는 개념이 없고, 남의 생김새에 대해 입을 대는 것이 큰 결례가 된다. 캐나다에서 키 작은 아이를 키우는 건 '우리 애는 머리가 곱슬이야'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귀국을 앞두니 내 복직이나 아이들의 복학보다는, 예약해 둔 성장클리닉 검사와 결과에 따른 후속 대응이 걱정이 된다. 결과가 좋으면 희망을 품은 채 지금처럼 살 것이고, 결과가 나쁘면 매일 밤 주사와 함께 하는 생고생이 시작될 것이다.


생사를 오가는 문제는 아니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이 고민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맘카페에 성장치료 문의와 경험담이 올라오고, 잊을 만하면 지인들이 넌지시 검사를 권하기 때문이다. 동네친구 K가 주사를 맞기 시작하더니 일 년 새 부쩍 큰 것도 조바심이 나게 한다. 무엇보다 지금은 괜찮다는 겨울이가 스무 살이 되어 성장판이 닫힌 후, "그때 왜 엄마는 그 정도밖에 노력하지 않았냐"라고 원망할까 봐 두렵다. 차라리 의학이 지금만큼 발전하지 않았거나, 한국 의료계가 이런 급진적인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갈등도 없으련만. 그래서... 부모의 의지(병원비를 대는 노력 포함)만 있으면, 수많은 선택권이 주어지는 서울이 부담스럽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내 마음을 최대한 다독이는 것뿐이다. 어젯밤 남편과 '사람 키는 유전일까, 환경일까'에 대해 부질없는 토론을 벌이다가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우리 동네에 병원이 많아서." 이렇게 살다가 정 답답하면 아파트 담벼락에 플래카드라도 하나 붙여야겠다. "제발 외모비교질 좀 그만해주세요!!!" 혹은 "그냥 생긴 대로 좀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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