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탁월 Apr 18. 2023

내일 합시다

출근 이틀차 아침. 목구멍이 부었다. 미세먼지 때문인가, 아니면 일하는 꿈을 꾸며 소리라도 질렀나. 침을 세게 한 번 삼키고 거울을 본다. 해탈한 부처의 처진 눈과 번뇌의 뜨거운 불기가 남아 있는 미간 주름이 공존하는 얼굴. 머리를 감는다. 뜨거운 물이 쏟아져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조금 비튼다. 미적지근한 드라이기 바람을 쐰다. 이대 팔 가르마를 끗발 나게 타고 포니테일로 질끈 묶는다. 정장을 척 걸친다. 일곱 시 3분, 현관문을 나선다.


오늘 오전에는 새 PC를 받았다. 32인치 데스크톱이 이렇게 널찍했나. 80센티짜리 화면에 작디 작은 메모장을 하나 띄워 놓고 네 줄짜리 메일을 쓰기 위해 30분간 머리를 싸맸다. 결국 참조를 넣느라 첨부 파일을 빼먹었다. 신규 입사자의 눈과 귀, 허리는 멀티태스킹에 능해야 한다. 눈동자는 모니터에 고정한 채 파티션 너머로 들려오는 해외 오피스 미팅 요약을 듣는다. 전무님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질 때면 나도 모르게 허리를 더 곧게 펴게 된다. 그러다 누가 날 부르기라도 하면 거북목이 순간 기린처럼 길어진다.


이전 회사에서는 짬을 좀 먹었다는 이유로 원하는 때에 담배라도 태울 수 있었다. 자유로운 스타트업 특성상 ‘담타’ 쯤은 기꺼이 존중해 주는 분위기였으니까. 그러나 이직을 하고 보니 기라성 같은 선배들에 비하면 내 경력은 귀여운 수준이고 담배 피울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오후 두 시 반쯤 되니 손이 떨렸다. 금단 증세인지, 계속되는 긴장에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것인지 아무튼 알 수 없는 증상까지 동반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참조가 메일함에 꽂히는 데 가속도가 붙더니 어느새 꽤나 무거워진 내 계정. 하나씩 붙들고 정독하다 보니 눈이 시려왔다. 낮아질 줄 모르는 사무실의 데시벨, 울리는 전화 소리, 회의실에서 들려오는 중요한 내용들, 바쁜 발걸음들. 오늘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때, 하루 종일 차분하고 섬세하게 나를 챙겨주던 선배가 내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나는 또다시 몹시 긴장했다.


예지씨, 내일 합시다


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었다. 말쑥하게 겉옷을 입고 크로스백을 반듯이 멘 선배가 손을 흔들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누군가에게 내일이라는 가능성을 담백하게 건넬 줄 아는 사람. 나는 저런 선배였던 적이 있던가. 아직 남아 있는 오늘에 괜한 미련을 얹어주는 사람은 아니었나. 돌아보니 이틀간 ‘더’가 아닌 ‘덜’에 초점을 맞춰주는 상사들이 더 많았다. 욕심 내지 말고 천천히 꾸준하게 가라는 말 역시 그들에겐 최선의 응원이었으리라. 무언가 몰아치는 날도 오겠지. 그럴 때 오늘을 기억하겠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일하지 말지어다. 때로는 하루 치의 가까운 미래에 지친 마음을 기대 보리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