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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은솔 Aug 28. 2023

외박 下

스무 살 무렵의 외박

스무 살이 된 뒤의 외박은 어렸을 때의 외박과는 조금 달랐다. 우선 더는 부모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빠는 여전히 내게 많은 것들을 '허가'하거나 '불허'하고 싶어했지만, 내가 그것을 거부했다. 이제는 외박을 하는 데 부모님 허락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지금은 술을 일절 마시지 않지만, 스무 살 무렵에는 말 그대로 술독에 빠져 살았다. 술을 마시다 보면 시간은 늘 모자랐다. 내 앞의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면 주저 없이 막차를 보내고 새벽까지 술자리에 앉아 있었다. 3차, 4차까지 이어지던 술자리는 대개 누군가의 좁은 자취방에서 마무리되곤 했다.


성인이 된 후로 부모님과 함께 산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아마 육 개월쯤 될 것이다. 모아놓은 돈 한 푼도 없이, 고시원에서라도 살겠다면서 막무가내로 집을 나왔다. 그게 스물한 살이 채 되기 전의 일이다. 내가 그렇게 빨리 집을 나와 살게 된 것은 당시에 어울리던 친구들이 대부분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야 월세를 벌어야 하는 생활의 고달픔을 뼈저리게 이해하지만, 그때는 그저 '독립'한 친구들이 멋져 보였다. 시간이 지나 나도 원룸에 살아보면서 원룸살이를 '독립'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나, 그건 좀 더 나중의 일이다. 나는 이불도 없는 맨바닥에 누운 채로, 머리통을 부술 듯한 숙취에 시달리면서, 옆에 잠든 친구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런 집은 얼마나 할까?


20대 친구들의 집은 대개 매우 좁았다. 그 좁은 집에서도 우리는 다닥다닥 붙어 앉아 술판을 벌이고 어떻게든 이불을 깔고 잠들곤 했다. 30대 언니들의 집은 그보다는 사정이 나았지만 역시 사람들을 마구 초대해서 놀기에는 협소한 편이었다. 그래도 언니들은 우리를, 나를 흔쾌히 재워주었다.


내가 거의 살다시피 하던 집도 있었다. 그 언니를 유진 언니라고 부르겠다. 유진 언니는 애교 많은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고양이를 보겠다는 핑계로 매일같이 언니네 집에 갔다.


술이라고는 소주와 맥주밖에 모르던 나에게 유진 언니는 양주의 세계를 알려주었다. 파란색 병이 예쁜 봄베이 사파이어를 콜라와 섞어 마시는 레시피를 언니를 통해 배웠다. 봄베이 사파이어에서는 싱그러운 풀 냄새 같은 것이 느껴졌고 술에서 그토록 좋은 향기가 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유진 언니는 당시 30대 초반의 나이였으므로 스무 살이었던 나와는 나이 차가 좀 있었다. 하지만 맛있는 술 앞에서, 밤새도록 이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 앞에서는 나이 차가 몇 살이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유진 언니의 자유로움이 좋았다. 언니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언니를 좋아하고 따랐다. 언니는 내게 많은 용기를 주었다. 스무 살 나이에 돈 한 푼도 없이 자취를 시작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언니 덕분이었다.


사실 내 자취가 그리 거창한 이유로 시작된 건 아니었다. 한창 즐겁게 놀고 있는데 집에서 수십 통씩 걸려오는 전화가 귀찮았고, 첫차를 타고 집에 들어가면 잠을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아빠의 걱정어린 애정이 지긋지긋했다. 술을 더 많이 마시고 싶었고 귀가 시각에 대해 그 누구의 참견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철없는 이유로 자취를 시작했다.


자취를 시작하고도 한동안은 줄기차게 외박을 했다. 내가 처음으로 얻은 방은 고시원이었고, 그건 집이라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딱딱한 싱글 침대와 조그만 옷장, 책상과 작은 냉장고만으로 꽉 차는 그 방 안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친구들을 데려올 수도 없었으므로 고시원은 집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불을 다 끈 상태에서는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귀여운 양 모양의 벽걸이 무드등을 켜둔 채 자곤 했다. 시끌벅적한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무드등을 켜고 딱딱한 침대에 누우면 왠지 눈물이 날 것처럼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면 늘 등허리가 뻐근하게 아팠고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운 디퓨저 냄새는 너무 지독하게 느껴져 두통이 일었다. 그게 싫어서 일주일에 5일쯤은 남의 집에서 잤다.


시간이 흘러 20대보다는 30대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스물여섯에 처음으로 원룸을 얻었고 그곳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고시원보다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뿐이지 여전히 4평이 될까말까한 작은 크기라서 친구를 데려와 재워주기에는 무리가 있는 방이다. 동생들에게 술과 고기를 양껏 사주고 막차 걱정을 할 필요가 없도록 잠자리까지 제공해주는 멋진 언니가 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스무 살 이후의 외박은, 단지 함께 어울려 놀았다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그때 서로의 '곁'에 있어주었다는 의미가 큰 것 같다.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그 수많은 날들에 내 곁에 있어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홀로 우울하게 잠들고 싶지 않았던 외로운 밤들을 함께 건너가주었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다. 그 모든 두려움과 고독함을 끌어안고 혼자서도 긴긴 밤을 잘 견뎌낼 수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은 그들이 만든 것이다.


망설임 없이 자기 공간의 일부를 타인에게 내어주었던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그때 마신 엄청난 양의 술들은 내 몸을 조금쯤 약하게 만들었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우리 사이에 분명히 있었다. 잊지 않으려 한다. 길고 지루한 삶의 한 찰나에, 우리가 서로의 곁에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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