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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은솔 Dec 10. 2024

노을 지는 강가에서

나는 200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희한하게도 1980~1990년대의 창작동요들을 들으며 자랐다. 어릴 때는 그 곡들이 그렇게 오래된 노래인 줄 몰랐지만 말이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동요 부르기를 권장하다 못해 거의 강요하는 풍습(?)이 있었다. 하도 시달려서 그 프로젝트의 이름까지 기억이 난다. '맑고 고운 노래 부르기'. 해당 명칭을 검색해보니 여러 초등학교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우리 학교만의 독특한 문화는 아니었던 듯하다.


우리는 학기 초가 되면 동요 악보를 인당 수십 장씩 받았다. 일 년에 삼십 개 정도의 동요를 배웠던 것 같다. 교실 한편에는 항상 '맑고 고운 노래 부르기'라는 라벨이 붙은 클리어 화일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아침에 등교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동요를 부르는 거였다. 선생님이 틀어주시는 반주에 맞춰 악보를 보며 일제히 노래를 불렀다. 유치하다며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학기당 한 번씩 동요 부르기 대회가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상품조차 없는 대회였다. 그저 상장을 줄 뿐인. 그런데 아이들은 그 대회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다. 이번에는 누가 대회에 나갈지 궁금해했고, 대회를 즐겁게 감상했다. 같은 반 친구가 칠판 앞에서 수줍어하며, 또는 의외로 자신 있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아무래도 재미있는 구경거리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회는 교실에서 학급별로 진행되었다. 최우수상과 우수상이 있었으니 한 반에서 두 명씩은 상을 타갈 수 있었던 셈이다. 대회에 나가는 아이는 대개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만큼 용감한 아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학교에서 배우는 동요들을 매우 좋아해서 집에서도 즐겨 듣고 혼자 불러본 적도 많았지만, 감히 대회에 나가볼 생각은 오랫동안 하지 못했다. 어릴 때 나는 조용하고 수줍음을 타는 아이였으므로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기 있게 손을 들고 앞으로 나가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이 대단해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저것보다 더 잘 부를 수 있는데'라는 얄궂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4학년이 되었을 때 드디어 대회에 나가보게 되었다. 평소 성격과는 다르게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번쩍 손을 들었다. 어떤 순간은 아무 까닭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내가 결심하지 않았는데도 사건은 일어나고, 나는 그 사건 속의 인물이 되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날도 여섯 명쯤이 대회에 출전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대회는 노래 실력을 보는 대회는 아니었다. 정확한 음정으로 정확한 가사를 부르는지 확인하는 대회였다. 선생님이 아무 노래나 골라서 반주를 틀어주시면 칠판 앞에 서 있는 아이들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누가 가사나 음을 틀리지는 않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해서 듣는다. 틀린 사람은 퇴장하고,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계속 노래를 부르는 게 그 대회의 규칙이었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평소에 많이 불러 익숙한 노래들만 나왔다. 아이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왠지 부끄럽지 않았다. 노래 한 곡이 끝나고 아이들이 웅성대기 시작할 때마다 '윤은솔 왜 이렇게 노래 잘해?', '은솔이 목소리 예쁘다'는 말이 들려와서 기분이 좋았다.


마지막으로 H와 나만이 남았다. H는 반장인 데다 얼굴도 예쁘고 친구도 많은 아이였다. 사실 그 교실 안의 모든 아이가 H의 친구였다. 나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따돌림을 당하는 건 아니었지만 편하게 말을 트고 지내는 친구가 전혀 없었다. H를 꼭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 위축되었다. 내가 H를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노래인지는 알겠는데 평소에 잘 듣지 않던 노래였다. 1절까지는 확실히 가사를 외우고 있었지만 2절이 문제였다. 이전의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갑자기 초조해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곁눈질로 H를 흘깃 보니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쨌든 노래해야 했다. 그 동요의 제목은 '노을 지는 강가에서'였다.


노을 지는 강가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도화지에 가득히 내 마음을 그렸어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좁다란 오솔길 따라
키 작은 코스모스가 하늘대는 그 속에서
엄마 아빠 손 잡고 웃고 있는 내 모습을
아주 크게 그렸어요 노을 지는 강가에서


1절은 H와 나 모두 완벽하게 불렀다. 여기저기서 '오~'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1절이 끝나고 간주가 흘러나오는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가사를 떠올려보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당황하든 말든 2절은 시작되었다.


노을 지는 강가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저녁 강변 가득히 내 노래가 퍼졌어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흥얼대던 그 가락은…….


여기까지는 잘 불렀지만 그 다음 가사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우물거리자 아이들은 곧바로 '어, 윤은솔 틀렸다!'라며 너도나도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는 동안 H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남은 가사를 부르고 있었다. 하필 내가 가사를 틀리자마자 고음으로 쭉 뻗어나가는 부분이 이어져서 H를 더 멋져 보이게 했다. H가 맑은 목소리로 어렵지 않게 고음역대를 소화해내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나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쭈뼛거리며 가만히 서 있었다.


2등이었으니 나도 잘한 거였지만 아쉽고 분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날 나는 내 화일에서 '노을 지는 강가에서'의 악보를 꺼내 손에 들고 하교했다. 사십 분 거리의 집까지 천천히 걸어가면서 계속 악보를 봤다. 두세 번쯤 불러보니 가사는 금방 외울 수 있었다. 이렇게 쉬운 걸 틀렸다니…….


나는 악보를 가방에 집어넣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또래의 시선에는 민감하면서도 길을 지나는 어른들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시절이었다. 내가 부르지 못한 가사는 이랬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흥얼대던 그 가락은
내가 아직 꼬마였을 때 아빠가 가르쳐주신 노래
엄마 아빠 손 잡고 부르고픈 그 노래를
아주 크게 불렀어요 노을 지는 강가에서


노래를 다 부르고 나니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1등을 하지 못해 화가 난 것도 아니었고, 노래에 감동받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그 순간 나는 가사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해버렸다.


노래 속의 화자는 아마 아빠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셨든지, 이혼해서 따로 살고 있든지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어쨌든 분명히 아빠가 없는 것 같았다. 어릴 때 아빠가 가르쳐주신 노래를 부모님 손을 잡고 부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까 강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갑자기 그 노래의 모든 가사가 내게 정통으로 부딪쳐 오는 것만 같아서 펑펑 눈물을 흘렸다.


나에게는 엄마가 없다. 그래서 노을 지는 강가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그 아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내 해석이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해석을 믿기로 했다. 그때부터 학교에서 배운 동요들 중에 그 노래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 삶의 많은 순간에 음악이 있었다. 음악을 통해 뜻하지 않은 위로를 받은 적이 무척 많다.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어릴 때 듣던 동요들을 종종 듣는다. 음악은 신기하다. 그 곡을 즐겨 듣던 순간 속으로 몇 번이고 나를 다시 데려가 주니까.


앞으로는 또 어떤 노래들이 나를 울게 할지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언제라도 좋은 노래를 만나면 기꺼이 눈물을 흘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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