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나의 2020 다이어리에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저지된 바람들이 가득 찬다. 항상 “-했으면 좋겠다.”로 맺어지는 하루의 짤막한 일기가 이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채우지 못한 빈칸들이 늘어가고, 가끔 다이어리를 펼치면 대부분 집안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나열하여 적을 뿐이다.
휴대폰 갤러리 속 사진을 구경하는 일도 부쩍 늘었다. 어느새 클라우드에 백업되어 있는 케케묵은 사진들까지 하나씩 훑고 나면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예전 사진들을 보는 것이 작년과 달라진 세상의 차이를 가장 극적으로 체감하게 만든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는 사진 속의 친구들과 내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 김에 남들이 취업을 위해 기본으로 따놓는다는 자격증 시험을 나도 준비하게 됐다. 심심한 일과에 무언가 집중해야 할 계획이 생긴 건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하나의 독립된 세계 같은 내 방 책상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나의 행동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집에 있으면 현실에 대해 자주 골몰하게 되는데 그래서인가 공부를 하다가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나 그 상태로 굳어서 멍을 때리는 일이 잦아졌다. 문득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곪아가고 있는 지구의 상태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져서 우리의 일상에 밀접하고, 최후의 수단처럼 모습을 드러낸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세상은 분주해졌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에도 비슷한 양상의 바이러스와 기후위기로 인해 치닫는 재해들이 상존해 왔다. 인간의 이기심과 외면이 자처한 일이다. 최근에 지구 멸망이 머지않았다는 이야기를 SNS에서 보고 난 후 탄식이 터져 나왔다. 단문의 게시글이었지만 부가적인 설명 없이도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내가 직접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취업을 위해 자격증 공부를 해야 하는 현실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바이러스로 인해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이런 비현실적인 순간들이다. 이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매일 고민하며 모든 의욕을 잃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기후우울증’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사를 보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기후위기로 인해 미래를 잃은 듯한 상실감과 슬픔에 빠지는 우울증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우울증은 보통 청소년과 청년들 사이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내가 느끼는 부분을 다른 이들도 느끼고 있던 것이다.
다만 나의 이런 무기력증은 슬픔보다 분노의 비중이 크고 상실감보다 죄책감이 자리 잡고 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굴레를 반복하는 인간들의 속성. 반성과 사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나 하나쯤이야”를 기반으로 눈과 귀를 막은 결과, 우리는 앞으로 이 땅에 살아갈 후손들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와 고통을 안겨줬다. 한창 개인의 미래에 대해 고민할 시기에 그들은 피켓을 들고나가 기존 세대들이 미뤄온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본인이 어떤 진로를 희망하고 무슨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고민보다, 지금 딛고 있는 지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떳떳한 자세로 그들을 마주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라도’라는 말은 이제 지친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다. 사람 간의 접촉이 불가피한 사회에서 접촉으로 인해 빠르게 감염되는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 어쩌면, 유기적 성질을 띄고 있는 사회를 향해 코로나 바이러스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모두에게 책임이 있으며, 다 함께 바뀌어야 한다고.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무엇도 탓할 수 없다. 모두 우리의 잘못이다.
글/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