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약속이나 외출이 취소된 요즘 느지막이 잠에서 깨면 뉴스를 본다. 최근 일어난 광화문 집회 및 일부 교회들의 부주의한 현장예배로 인해 심화된 사태는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다. 바이러스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사람이 없는 실내에서 활동하는 버릇을 들이게 된 지 반년 이상이 흘렀다. 작년 중순까지만 해도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팬데믹 상황은 우리 일상에 거대한 변화를 불러왔다. 고작 반년만에, 온 지구인의 생활모습이 바뀐 것이다. 유독 비가 많이 내렸던 이번 여름은 마스크를 쓰고 바깥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마스크와 맨살 사이로 습도 높은 더운 공기가 들어찼다. 장시간 활동해야 할 일이 생기면 숨쉬기마저 버거워졌다. 자유로운 숨쉬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나는 팬데믹을 맞이하고 나서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기나긴 장마와 혼란스러운 국내외 정서는 코로나 19로 인한 피로를 더욱 깊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코로나 19가 공동체를 좀먹어도 삶은 계속 지속되고 있다. 가장 익숙한 공간이자 먹고, 자고, 휴식하는 공간인 “집”은 재택근무 흐름으로 인해 일터가 되었다. 출퇴근 시간을 전면 조정하면서 생활 패턴이 달라졌다는 이야기 또한 숱하게 들었다. 우리는 코로나 19로 바깥 생활이 어려워졌음에도 선거를 하고, 수업을 듣고, 주어진 일을 하고 있다.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각자의 위치와 할 일은 변함이 없다. 인간은 망각하고 적응하는 동물이라는데, 사람들은 마스크 없이 보낸 일상이 흐릿해질 정도로 바쁘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불안과 불편함으로 영영 빼앗길 것만 같았던 일상은 이렇게 지속된다. 하지만 앞으로 더욱 급변할 삶의 형태를 가늠해보면 어쩐지 아득하고 깜깜하다.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의 영역이 아닌 것들을 망각하고 적응하기를 번복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인구의 바깥활동이 현저히 줄어들면서 공기가 훨씬 맑아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간으로부터 터전을 빼앗겼던 동물들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사진들도 볼 수 있었다. 소소하게 목격된 변화와는 달리 실생활 모습은 더욱 악화됐다. 주말마다 일하고 있는 카페에서는 일회용품 사용이 현저히 늘었다. 매장 이용을 지양하자는 움직임 때문이었다. 일회용 컵, 장갑, 마스크 등 쓰레기는 끝도 없이 늘어나고 있다. 현시점이 코로나19라는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과도기 단계라 할지라도 경각심이 필요하다. 일말의 반성 없이 계속되는 육식은 또 어떤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창궐할 바이러스가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자명한 사실이다. 코로나 때문에 울리는 수많은 재난문자 속에서 가끔 발송되는 아프리카돼지열병 관련 소식은, 무분별한 도살과 가축 형태로 인해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살처분되고 암매장됐는지 깨달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장마로 인해 피해를 입은 축산 농가에는 재난 상황 속에서 구조받지 못한 소들이 물살에 떠밀리고, 거리를 배회하다 목숨을 잃었다. 이렇듯, 이 현실 속에서 더 이상 지속 가능한 육식은 없다.
바이러스로 인한 비극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방역에 실패하면 전 국민의 생활이 멈출 것이고, 개인의 면역력에 따라 삶 또한 잃게 될 것이다. 만약 방역에 실패한다면? 곧 안정기가 찾아올 줄 알았던 한 달여 전에 비해 한국은 다시 위기를 맞이했다. 변수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제 지나온 삶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일시적인 방어와 민첩한 적응력, 자연스러운 망각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일부’로서, 공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글/ 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