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사람들은 그를 '에덴아저씨'라 불렀다. 그가 오십여년전 처음 미국으로 건너와 젊은 시절 운영했던 청과물 가게이름이 '에덴청과'라는 말이 있었다. 그가 내 눈에 들어온 건 누나네 스시집<도쿄>에 내가 합류하고 한참이 지난 후였다. 홀 서빙을 맡은 나는 업무(?)적으로 관계가 많은 주방과 홀 사람들과는 빠르게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간혹 눈에 띄는 그의 존재는 나의 시선을 한참 동안 잡지 못했다. 그는 가게 뒷켠의 비품창고 관리와 갈비 다듬는 일을 부정기적으로 봐주는 말 그대로 '백서포터'였다. 칠십은 훌쩍 넘은 나이에 어깨는 굽어 있고 왜소한 체격으로 어디서든 존재감이 없어 보였다. 늘 조용한 목소리와 어딘가 불편한 듯 비척거리는 걸음은 그를 더욱 존재감 없게 만드는 듯했다.
어느날 저녁 일이 끝나고 좀처럼 홀에 나오지 않는 그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서울 삼촌, 이것 좀 봐줄래요"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카카*톡이 어디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살펴보니 사라진게 아니라 다른 화면에 넣어 놓고 찾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아저씨 이럴 경우 요걸 누르시고 처음으로 돌아가시면 되세요" 그는 아주 밝은 표정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애들이 이걸로 하면 된다고 하는데.. 이제 살았네" 아저씨에겐 서울에 가족이 있는 모양 있었다. 내친김에 나는 카카*톡으로 음성통화를 하는 방법을 가르쳐 드렸다. 주소록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중년의 여인 프사가 보였다. 그의 아내였다. 이내 통화가 이뤄지자 아저씨는 예기치 못한 과목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듯 세상 놀라며 기뻐했다. 내가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게 그때가 처음이였다. 그는 나이에 비해 아주 부드러운 눈매와 마주한 사람은 누구나 무장해제될 수 밖에 없는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저씨는 뉴욕시에서 제공하는 노인복지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마침 나의 숙소와 방향이 같아 그가 출근하는 날이면 운전을 못하는 그를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 처음엔 한사코 괜찮다던 그도 두시간이나 걸리는 퇴근길은 마다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퇴근 동지가 되었다. 아저씨는 1970년대에 미국에 건너왔다. 처음에 와서 자리를 잡고 아내를 부르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을 흘러 흘러 오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젊은 시절 두어번 한국을 다녀간 덕에 아들이 생겼단다. 그리고 그 아들이 작년에 결혼을 했다고 사진을 보여주곤 했다. "이제 가끔 한국도 가시고 하셔야 하는거 아녀요?" 나는 이해되지 않는 그의 삶에 트집잡이 질문을 던졌다. "이제사 가면 뭐해. 그리고 여기 소셜시큐러티에 걸릴 수도 있어. 한국 자주 댕기면" 오년도 아니고 오십년을 떨어져 사는 것이다. 누나의 말에 따르면 젊은 시절부터 돈 버는 대로 한국으로 보냈다는 것 같다. 그에게 결혼은 어떤 의미이고 가족은 무엇일까. 오십년의 세월을 바쳐 지켜야할 그 가치가 무었일까...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졌다.
하루는 아저씨가 커다란 봉투를 나에게 건넨다. "혼자일수록 잘 챙겨 먹어야 해" 봉투속엔 남미산 바나나 한송이, 그릭요거트, 초콜릿, 그리고 파운드 케익이 잔뜩 들어있다. 집에 혼자 있을때 챙겨 먹으란다. 비척거리며 꽤 먼 거리의 마트를 걸어 무거운 짐을 챙겨 온 그가 그려진다. 가슴속에 그의 배려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늘 남에게 피해는 절대 주지 않는 아저씨는 모든 걸 내어주는 어릴적 외갓집 아재 같았다.
뉴욕을 떠나기 전 마지막 퇴근 픽업을 하는 밤에 가을비가 오늘처럼 추적거리며 내렸다. 아저씨는 차에서 내리는 걸 망설이며 나에게 말을 건넷다 "서울 삼촌, 한국가서 할 일 없으면 걱정하지 말고 다시 짐 싸서 들어와. 여기 그런대로 살기 괜찮어. 나도 많이 도와줄께" 갑작스레 백수가 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당시의 나는 순간 가슴이 뭔가 꽉 차오르는 느낌이였다.
가끔 삶이 마음같지 않을때 에덴아저씨의 삶이 떠오른다. 욕심과 분노도 뛰어넘어 엷은 미소로 하루 하루를 또박 또박 걸어가는 그에게는 지금 여기가 에덴동산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