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산 Jul 05. 2022

딸과의 저녁

딸아이가 주말에 서울에 놀러 오라고 했다. 두어달전 코로나 방역이 완화되자 딸아이 직장도  동안 시행하던 재택근무를 중단했다. 독립을 위해 작년에 얻어 놓은 딸아이 서울 집은 재택으로 입주가 차일 피일 미뤄졌었다. 재택이 끝나자 딸아이는 작심하고 짐을 챙겨 나갔다. 독립한 딸아이는 2주에 한번 보기도 힘들어졌다. 미안한 마음에 나더러 서울로 올라와 영화 보고 저녁을 먹자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딸아이는 미리 알아뒀다는 홍콩음식점으로 향했다. 본점이 홍콩에서도 유명하다는 식당은 꽤 많은 사람들이 웨이팅중이였다. 식당은 넓직한 테이블 간격에 천장이 높아 흡사 고급 피로연이 어울리는 호텔레스토랑 분위기였다. 딸아이가 메뉴판을 건네며 먹고 싶은걸 골르란다. 메뉴를 보니 밤톨만한 만두 세개 담긴 한 접시에 만원에 가깝다. 식당 분위기상 비쌀거라 예상했지만 특별한 날도 아닌 캐쥬얼 저녁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군다나 딸아이가 사주겠다고 하니 더 부담이 되었다. 난 두 종류 접시를 선택했다. 딸아이는 다른 종류 세 개와 날 위한 맥주와 볶음밥까지 시켰다. 아무리 사회생활을 한다고 해도 신입사원의 호주머니가 뻔할 텐데 싶어 내 얼굴 표정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나의 기분을 알아차린 딸아이는 연신 맘 놓고 먹으란다. 순간 아버지가 떠올랐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아버지께 외식을 제안하면 늘상 아버지는 중국집을 택하셨다. 기껏해야 짜장면과 울면을 드셨다. "난 이게 제일 맛있다" 하신다. 어머니는 늘 그런 아버지의 그런 소심함을 타박했다. 아버지는 어릴 적 월북하신 할아버지와 재가하신 할머니 때문에 외삼촌 손에서 고아처럼 자라셨다. 가난이 뼈에 사무치고 가족이 전부인 아버지는 나름 머리가 좋으셔서 당시 알아준다는 농업고등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셨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머리 좋은 아버지는 지금의 농어촌공사격인 수리조합에서 일하셨다. 지역에 물길을 만들고 원활히 수자원을 공급하는 댓가로 수세를 징수하는 기관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동네에서 아버지는 늘 식자였고 품의 있는 선비였다. 동네사람들은 늘 아버지를 귀히 여겼다. 우리 집안분위기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매사에 검소했다. 어머니의 폼생폼사 대범 철학에 비해 아버지는 늘 아꼈고 조심했다. 어릴 적 가난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우리 남매는 늘 엄마편을 들었다. 검소하고 근면하고 융통성 없는 아버지의 삶이 너무 답답했다. 남들처럼 적당히 속이고 적당히 타협하며 어머니 말대로 소위 '뽄떼"나는 삶을 원했다.

아버지에겐 자식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평생 회초리는 커녕 이놈 저놈 소리 한번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하소연하는 친구들의 말은 먼나라 이야기 였다.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선 늘 모든걸 내어 놓으셨다. 공부하라 소리도 하지 않으셨고, 없는 살림에 서울로 대학 보내 달라는 막내아들의 떼를 못이기고 들어주셨고, 데모한다고 경찰서 들락거리는 아들을 위해 아무런 소리 않하시고 사식을 넣어 주시고, 혹여나 딴 생각할까 관심있어 하는 여자친구 불러내 아들과 잘 사귀어 달라고 부탁도 하셨었다. 정작 그런 아버지가 출가해 살림을 차린 아들이 식사를 모신다고 하면 한사코 경회루 짜장면이셨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싫었다. 자식은 세상 무엇보다 귀히 여기시며 정작 본인은 챙기지 않는 모습이 너무 답답했다. 나를 위하기 보다 나의 의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거부당한 느낌이였다.

아버지 생각이 떠오르자 딸아이와의 저녁식사가 즐거워졌다. 아니 즐거운 척 해야 했다. 밝게 웃으며 술 한잔 더 시켜도 되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딸아이는 신이 난 듯 말한다. "응응.. 아빠 맘껏 마셔" 돌아오는 전철에서 나이들수록 아버지의 삶과 나의 삶이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 <도쿄>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