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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개 Mar 12. 2024

노출!

발가 벗겨진다는 것.


뉴마날리에서 올드마날리로 이동. 배낭의 무게도 확인할 겸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버스를 타지 않고 걷는다. 마날리는 예전과 달리 차분했다. 짜증 나던 이스라엘 청년들의 바이크 소리나 카페 입구에서 붕붕거리던 스피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항상 헤시시에 취해있던 마날리의 모습은 사라졌다. 당시에는 불쾌함에 가까웠던 것들이 지금은 왜 아쉬운 걸까. 이젠 추억이 되었기 때문이다. 추억은 아름답고, 우리는 아름다운 것에 집착한다. 추억하는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 지나치게 달콤한 추억은 정신을 비만하게 한다. 무기력해지기 쉽다. 무기력은 유일하게 퇴행에 적극적이다. 늙은이가 지난 일에 남은 삶을 소비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이유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좋지만, 계속 돌아서 있으면 안 된다. 


두 연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기로 했다. 남은 객실이 없어 나는 다른 곳을 찾기로 한다.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다. 배낭을 맡기고 예전에 묵었던 숙소를 찾아보기로 한다. 빈 어깨가 유난히 홀가분한 것은 체력이 약해진 탓이라 생각한다. 예전에 묵었던 숙소를 찾아봤다. 길옆의 상업지역은 대부분 그대로지만 주거 지역에는 많은 건물이 생겨났다. 주로 게스트하우스가 생겨났고 지금도 공사 중인 곳이 많다. 돈의 힘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은 환경을 변화시킨다. 지구의 자전 속도보다 빠르다. 어렴풋한 인상만 가지고는 며칠 묵었던 곳을 찾을 수 없다. 세밀한 것은 쉽게 마모되기 마련이다. 기억도 그렇다.


 길에서 만난 한국인이 장기투숙을 조건으로 하루 350루피에 묵고 있는 자신의 숙소를 소개한다. 전망이 좋다고 했다. 추천받은 숙소를 찾아가 흥정을 한다. 400루피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최선을 다하고 싶었지만 협상력이 예전만 못하다. 400루피에 계약을 하고 연이 있는 숙소에 배낭을 가지러 간다. 

정원의 테이블에 십여 명의 여행자들이 있다. 빈자리에 앉았다. 두 연을 기다렸다. 함께 여행을 온 남매(누나와 남동생)와 잠시 얘기를 나눈다. 한참을 기다렸다. 씻고 나온다던 그녀들은 소식이 없다. 다시 한참을 기다린다. 그 한참은 합의되지 않은 시간이다. 각자가 지루하다 느낀다면 그만큼이라 생각하면 된다. 내가 참을성이 부족한 편이 아니라는 것만 말해둔다. 아무튼 두 번의 한참과 또 한 번의 지루한 기다림 끝에 작은 연이 등장했다. 이제 큰 연을 기다린다. 두 번의 지루함이 또 지났다. 지루함은 사람을 능동적으로 만든다. 나는 건물 외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방문이 외부에서 빗장으로 잠겨있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잠근 것이다. 큰 연은 밖으로 나오려다 문이 잠겨 그냥 빨래를 했다고 말한다. 누군가 오겠지 하면서 말이다. 결국 누군가는 바로 나였다. 태평해 보이는 그녀가 커 보인다. 


함께 정원으로 내려와 작은 연에게 잠긴 문에 대해 말했다. 작은 연이 문고리는 만진 적도 없다고 한다. 그럼 누가? 작은 연에게 다시 물었다. 절대로 아니라고 한다. 미궁에 빠진다. 계단은 외부로 노출되어 있으며 객실은 벽이 없고 지붕과 난간만 있는 통로를 따라 있다. 한눈에 볼 수 있다. 나는 그곳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방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간 사람은 유일하게 어린 아기 한 명이다. 계단을 오르던 걸음이 불안해 보였었다. 아기가 문을 잠갔을 리 없다. 아기의 손으로는 까치발을 서도 빗장을 잡기 힘들다. 초자연적 현상은 더욱 믿기 어렵다. 종합해 보면 0.1%의 확률이지만 그 확률의 대상은 아기가 유일하다. 우리는 논의 끝에 아기를 잠금 행위자로 잠정 지목한다. 그러나 아기를 기소할 수는 없다. 직접 증거는 없고 심증만 있다. 유일한 목겨자인 나도 아기가 계단을 불안하게 오르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이것으로 사건을 종결한다. '방문잠금사건'은 미결로 남았다.


두 연과 현지 식당에서 탈리와 만두로 식사를 했다. 가끔 들렀던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간호학 학생 '디'를 다시 만났다. 자전거 트래킹을 한다는 '씨'와 함께 내 숙소 옆에서 함께 묵고 있다고 한다.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숙소로 간다.


짐을 풀어 정리한다. 샤워를 하려 옷을 벗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신호가 온다. 문을 닫고 변기에 먼저 앉는다. 화장실 문이 스르르 열린다. 문을 닫을까? 혼잔데 뭐. 열려있으면 어때. 아무렴 아무 상관없지. 아래쪽에 집중을 하고 매끈하게 두 놈 정도 먼저 내보냈다. 업무? 중간에 문득 통로 쪽 창문이 신경 쓰인다. 커튼이 30cm 정도 열려있다. 커다란 눈이다. 창문이 나를 빤히 보고 있다. 내 행위가 창피한 일은 아니지만, 창피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내 안에서는 이미 불안한 마음과 쪽팔림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설마 누가 일부러 시선을 주며 보겠어? 나 같은 인간은 무조건 본다. 하지만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걱정할 것 없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운에 맞긴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 지 확인하는 것은 24초도 걸리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본 창문


창가에 인기척과 함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전신의 땀구멍이 좁아졌다. 통로 의자에 배낭을 올려놓는 소리가 들린다. 동공이 커진다. 문을 닫아 보려고 손을 뻗었다. 너무 멀다. 재빠르게 일어나? 모르는 소리. 업무가 진행 중이다. 잠깐 끊고 움직인다? 그러다 엉거주춤으로 마주치면? 아~ 놔... 그건 더욱 아니다. 다리는 손보다 길다. 바들바들 뻗어 본다. 역시 멀다. 아 모르겠다. 어떡하지? 운명에 맡기자. 반드시 쳐다본다고 어떻게 장담? 하알... 이런 거지 같은! 눈이 마주쳤다. 여자다. 얼떨결에 인사를 할 뻔했다. 망할! 얼굴을 가리거나 중요 부위를 감싸거나 하지 않는다. 못한다. 그냥 멀뚱하게 모든 수치스러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자는 주섬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속 어른거린다. 눈을 부릅뜨고 창을 바라보았다. 정면으로 맞서는 게 나를 지키는 거다. 여자가 사라졌다. 부릅뜬 눈은 힘이 풀렸다. 멍하니 창밖을 계속 보았다. 뇌는 물론 자율신경계도 마비되었다. 그냥 앉아있다. 


똥 안 싸고 사는 사람 있냐, 나쁜 짓을 들킨 것도 아닌데, 어차피 모르는 사람 아니냐는 등의 위로는 필요 없다. 나도 내 일이 아니면 그렇게 말한다. 쪼그려 앉는 변기가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상상해 보니 그 말은 좀 위로가 된다. 





발가벗고 앉은 변기 위에서 생각한다. 

세상의 누구도 발가 벗겨져서는 안 된다. 마녀를 불태우면 자신의 죄와 두려움도 함께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상대를 비난하거나 극렬하게 공격하는 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탐욕이나 죄가 더 크고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무의식 안에 억압하고 감추었던 자신의 추한 모습이 상대를 통해 드러나자 놀란다. 과격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심리적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상대에게 투사하고 폭력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죄 씻김의 의식을 행한다. 상대가 강한 정신력으로 무너지지 않고 견디면 그의 가족과 친구와 이웃에게 까지 모욕과 수치의 불을 지핀다. 완전한 고립을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 이보다 사악한 것이 있을까. 내가 벗을 수 없다면 벗기지 말라.






디와 씨의 숙소를 찾았다. 씨는 알고 있는 여행 정보를 설명했다. 나는 자주 가던 카페에 그들과 함께 간다. 일행은 나를 포함 네 명이다. 나와 씨, 디, 여자인 학원 강사 '에이'. 씨는 외국인과 선약이 있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디는 잠시 후 씨를 찾으러 간다며 나갔다. 두 사람은 소식이 없다. 나와 에이는 돌아가기로 했다. 가던 길에 디를 만났다. 그가 있던 곳에 같이 간다. 카페 안에는 흑인과 백인 그리고 씨가 함께 물담배를 빨고 있다. 씨는 영어로 나를 소개했다. 백인 남자는 영국인이고 암벽등반을 한다고 했다. 내게 물담배를 권했다. 사양했다. 그들은 폐활량 측정을 위해 서로 돌아가며 열심히 빨아댄다. 흑인 친구가 가장 많은 연기를 피워낸다. 굴뚝처럼 뿜어내는 연기를 보며 모두가 감탄한다. 박지성이나 이봉주가 한 번 빨았다면 어떨까 싶다. 


자리를 옮겨 킹피셔(맥주) 한 병씩 들고 잡담을 한다. 내 여행 계획을 들은 영국인은 용감하다고 한다. 칭찬에 앞뒤를 못 가린다. 대화는 종교이야기로 이어졌다. 참고로 나는 종교가 없다. 흑인은 무슬림이다. 나는 무슬림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대부분의 종교는 상징이 있다. 신상이나 십자가처럼, 그런데 이슬람은 상징물이 없다. 오직 말씀 즉, 코란만 있다. 그것이 독특하다." 이 말 한마디에 분위기는 이상기류에 흔들렸다. 눈치 없는 인간은 어디서나 불화의 씨앗이 된다. 씨가 재빨리 분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수습한다. 영국인 친구가 불편해한다며 조용히 우리말로 눈치를 준다. 


무슬림에 대한 편견 없음과 배려를 통해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려는, 그렇게 보이도록 하려는 나의 행동은 그 유치함이나 어리석음을 통해 내가 강한 편견을 갖고 있다는 걸 드러내고 말았다. 얼굴에 열이 난다. 결국 어떤 배려도 없이 영국인을 비롯한 모두를 불편하게 했다. 속이 거북하고 피로감이 몰려온다. 

나는 다시 발가벗은 채 있다.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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