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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니스 Apr 23. 2022

프롤로그

나는 ADHD (사회인, 엄마, 아내) 이다.

만성적인 공허감, 언제나 무력했고, 성취와 인정에 목 말랐고, 나는 이 정도에서 만족할 사람이 아니란 걸 어렴풋이 떠올리면서도 누구보다 나의 현실적인 한계를 먼저 생각했고. 그래서 늘, 고만고만하게, 실패만 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살아 왔던 37년.


임상심리사 수련을 받을 적엔 나의 만성적 공허와 의욕 없음이 내가 혹시 PD(Personality Disorder)라서 그런걸까? 라고 생각했었다. 슈퍼바이저 선생님도 나의 그 공허에 공감해 주시며, 그래, 그런 공허는 사실 흔치 않는 것-이라 말했었기에, 그래, 난 성장 과정에서 무언가 비뚤어진 성격이 고착되고, 이에 삶의 만족과 즐거움을 모르는 차가운 도시여자가 되었나 보다, 하고 다시 저 깊은 어딘가의 잠재로 나를 밀어 넣었다.


그렇게 20대의 끝자락에서 지금의 신랑을 만나 광속으로 결혼을 하고 1년만에 토끼 같은 딸을 얻고 4년만에 다시 여우같은 아들을 얻는 동안, 육아는 고되었고, 고통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육아라는 것은, 나의 무능력을 끊임 없이 마주하고 인정하며 다시 한번 잘해보자 토닥이는 과정이 되어야 했으나, 사실 나의 무심함(?)에서 오는 잦은 실수와 누락과 정신 없음은 아이를 제대로 케어하지 못한다는 화살이 되어 스스로를 학살했고, 그것은 나의 무덤이 되어 가고 있었다. 끔찍한 무력감은, 내가 표상한 나와 너무 달랐고, 괴리가 있었고, 인정할 수 없었으나, 성장 과정에서 늘 대충대충해도 좋은 결과를 내었던 나의 막된 삶이 한순간에 탄로나는 과정인 듯 하여 두려웠고, 막막했고, 외로웠다.


여우같은 둘째가 두 돌이 지났을 무렵, 무능감과 자기비난적 태도에 쩔어가고 있을 그 때 사실 지금의 병원에 입사하게 된 것은 은혜였고, 원장님은 은인이었다. 처참했던 내면이 다시 회복되고 나를 되찾으려면 엄마로써의 역할을 벗어나야 했고, 나만의 능력과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언 개원한지 1년 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나는 *메디키넷을 처방 받았다. 단순히, 쌓여가는 보고서를 순차적으로, f/u에 늦지 않게, 잠을 이기기 위함이 최초의 목적이었으나, 그것이 준 신세계는 나를 새로운 통찰로 안내하였다.



함께 일하는 임상심리사 동료와 원장님이 환자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중, ADHD 들이 보이는 우울과 무력감에 대해 언급 되면서, 원장님의 과거 아줌마 환자 한명이 소환되었다고 한다. 얼핏 보면 우울감을 호소하며 닥터 쇼핑을 했던 그 아줌마는 능력이 많은 커리어 우먼이기도 하였는데, 늘 뭔가 욕구 불만에 시달리며 내노라 하는 정신과 의사들을 찾아 다녔으나, 만성적인 우울은 쉽게 가지시 않았다고. 결국 하다하다 건너건너 소아 전문인 원장님에게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는데, 원장님은 '그래서 뭐가 불편한게 대체 뭐냐' 라고 물었단다. 그에 대해 그녀는 '할게 많은데 일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하는게 답답하다'고 호소하였고, 원장님은 '그럼 해야 할 일을 잘 할 수 있는 약을 드릴테니 드셔보세요' 라고 하고 그녀를 돌려 보냈다. 다음 진료 때 그녀는 얼굴에 화색이 돌며 '대체 나에게 어떤 마법의 약을 준 것이냐'고 반문했다고. 그 에피소드를 말한 후, 두 번 째로 소환된게 바로 나. 나의 우울감에 대해 원장님은 이미 캐치 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우려도 조금은 표시했다는 후문.


이 얘기를 전해들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원장님이 선뜻 메디키넷을 처방해주고, 그 전부터 농담 반으로 본인도 주의력 약을 먹음을 어필하며 "쌤도 드셔보세요, 좋아요" 했던 이유를 그저, 오타 많은 나의 보고서, 업무와 육아로 늘 쩔어있는 나의 루틴을 알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근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원장님은 나를 ADHD로 거의 진단을 내리신 듯 했고, 거기에서 시작하여 그간 원장님과의 대화 내용과 패턴, 나의 말투나 말하는 방식 등에 대해 메타인지를 발휘하여 따져 본 결과, 장황하고 조직화 되지 않은 채로 공중에 흩어졌던 그와의 몇 번의 대화가 떠올랐다. 거기에서 더 뒤로, 뒤로, 5년 전, 10년 전, 고등학교 시절까지로 기억의 테잎을 돌려 봤을 때, 모든 퍼즐의 조각이 맞춰지는 이 쾌감이랄까.


그래...나는 진짜 ADHD였던 것이다. 능력에 비해 성취가 없고, 가진 것을 발휘하는데 어려움이 현저한, 자기 불만족과 무력감과 만성적인 공허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그렇다고 해서 수행이 짜다리 나아지지도 않는 구질구질한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열쇠를 얻었다. 왜 나는 작심삼일에 그치는 계획만 즐비한지, 용두사미도 못되는 아이디어만 넘쳐나는지. 내 모든 삶을 설명해줄 순 없겠지만, 그 통찰과 고충과 시행착오에 관한 이야기를 주섬주섬 정리해볼까 한다.



*주의력 결핍에 처방되는 향정신성약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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