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앉은 그는 마치 열 살 소년 같았다.
검사에서 얻은 insight를 공유하기 위해 병원에서 만난 환자를 언급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한 때는 비밀보장, 익명성 보장, 이 정도의 검사자 윤리만 벗어나지 않는다면야,라는 위험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모든 개개인이 *DSM-5 진단체계 아래 동일하지 않으며, 증상도 다르고 경험도 다르니, 당사자만 괜찮으면 괜찮은 거라는 아주 미숙한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환자를 만나면 만날수록 어렴풋이 깨달아지는 점 한 가지는, 비록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라 할지라도 다름 속에 같음이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는 사소한 자극에도 다시 벌어지고 더 깊은 염증을 남길 수 있다. 화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문제이며, 청자든, 독자든, 무방비 상태에서 맞닥뜨릴지도 모르는 그 자극이란 것은 심리적 외상의 반복이자 재생산이 될지도 모르는터. 말은 신중히, 글마저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다다른 것이겠다.
그래서, 사실,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한 몇 편의 글이 내 글쓰기 서랍을 채우고 있다. 하지만 오늘도 다시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비슷한 주제로 글을 써 내려가는 걸 보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마음속에, 손 끝에 맴돌고 머물러 있는가 보다.
내 주 근무처는 소아를 위주로 진료하는 정신건강의학과이지만, 한 블록 아래 성인만 진료 보는 정신건강의학과에 한 번씩 출근하기도 한다. 우리 원장님과 같은 상급 병원에 있던 선생님이 몇 년 일찍 개원을 했고, 그래서 우리 원장님이 개원을 준비하던 시절 많은 도움을 얻었다는 후문. 우리 병원은 시청과 관공서가 밀집한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맞은편 건물에만 정신과가 2개, 로터리를 끼고 시내 방향으로 두 블록 정도만 걸어가면 정신과가 3개, 그리고 우리 병원보다 한 블록 아래로 위치한 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그 정신과이다. 이렇게 사방팔방으로 정신건강의학과가 즐비해 있지만, 소아 전문은 우리 병원이 거의 유일하고, 심리검사자가 상주해 있는 병원 역시 우리 병원이 유일무이하다는 사실. (이렇게 내 직업의 희귀성과 희소가치를 또 한 번 증명하는 것인가). 그래서인지, 개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한 블록 아래 위치한 정신과에서 나를 '빌려달라'는 부탁을 해 왔고, 그렇게 나는 알바 비슷하게, 우리 병원의 진료가 없는 날이면 그 병원으로 출근해서 한 케이스 정도의 종합심리검사를 진행하데 된 배경이 있다.
성인 정신과의 경우, 특히 대학 병원급이 아닌 개인의 원인 경우 환자의 심리검사를 굳이 필요로 하진 않는다. 의사들이 자신의 진료 경험에 따라 적절한 약물적 개입으로 치료를 진행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심리검사는 심리 장애의 *전구기 혹은 증상 초기에, 실제 장애 진단 가능성 여부를 판단하고 진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조현병이나 양극성 장애와 같이 조기 개입과 적절한 치료를 요하는 장애이거나, 증상과 고통이 severe 한 상황이면, 실제 환자가 진단 선상에 있는 것인지 정확한 판단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 같은 상태에서는 사실 애초에 큰 병원으로 내원하여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개인 병원의 환자들은 장애가 만성화되었거나 혹은 지속적인 정동문제, 성격적인 취약성 등으로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볼 수 있겠다.
때문에, 성인을 진료 보는 개인 정신과 의원에서 심리검사를 진행하면 10명 중 8-9명은 '병무청' 환자들이다. '병무청'환자라 함은, 군입대를 앞두고 신체검사에 제출할 서류를 마련하기 위해 내원하는 성인 초기의 남성 환자들을 일컫는다. 아동기부터 소아정신과에서 진료를 봐 왔던 환자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군입대를 준비하며 미리미리 심리검사를 받아 놓지만, 성인병원의 경우 좀 다르다. 환자 대부분은 훈련소까지 입소했다가, 급성의 증상들로 인해 버티지 못하고 퇴소한 뒤 병원을 찾아오는 케이스라 봐도 무방하다. 본인들도, 가족들도, 명확히 인지는 하지 못하였겠지만 심리적 취약성은 늘 잠재해 있었을 테고, 그러나 그것이 표면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계기가 없었을 뿐이었던 환자들. 그들은 진짜 어리면 10대 후반이고 거의가 20대 초반의 한창 아름다움을 뽐낼 나이들을 하고 있다. 한창 꽃 피워도 모자랄 나이. 하지만 하나 같이 어딘가 풀이 죽은 채로, 인생 37년 산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구부정한 허리를 펼 생각도 않은 채 3시간을 앉아 있는다. 아주 간혹 가다가 경조증이나 연극성장애의 특성을 보이는 환자의 경우, 상당히 쾌활하고 밝은 에너지로 나에게 살가움을 표하며 다가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삶의 답도 의미도 찾지 못한 얼굴로 나를 마주하는 것이다.
그들을 만나고 나면 늘 드는 생각이 있다.
나이는 20대인데, 마치 10살, 11살 초등학생을 검사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 그들의 미숙함을 비하하거나 비난하려는 의도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들이 심리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 요인은 여전히 잔존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는 원가족 내에서의 부당하고 불합리한 역동이 환자의 핵심적인 문제일 때가 많고, 이는 환자의 타고난 기질적인 특성이나 자질 등과 콜라보하면서 더욱 극대화되는 측면이 확실히 있어 보인다. 같은 사건을 경험하더라도, 누군가는 심리적 외상으로 남지만 혹자는 외상 후 성장으로 발돋움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기도하다. 특히, 부친의 양육 태도(양육이라 하기도 민망하지만), 과격하고 폭력적인 언행에 노출된 빈도가 많은 환자일수록,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마음 밭이 취약하고 유약한 환자일수록, 심리적 고통은 마치 늪지대처럼 환자를 집어삼켜버린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심리적 성장을 가능케 하는 핵심 요소 두 가지가 '통찰'과 '대처기술'이라 한다면, 이들은 통찰을 얻기 위한 사고 과정도, 대처기술을 학습하기 위한 전략적 개입도 적절히 경험해 본 적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에도 빈익빈 부익부가 존재하게 하는 원리라 하겠다. 스트레스를 경험할 때, 누구도 그들이 스스로 '버틸 수 있게' 지지해 주지 않았고, 버티는 방법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버티는 것이 필요한 상황임을 깨닫도록,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도 않은 것이다. 그렇게,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의 고통스럽고 미운 자신을 마음속에 품은 채 몸만 커 버린 사람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다. 그럴 수 있다. 그러니까 신체검사 무사히 통과해서 훈련소까지 입소했을 테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몸만 건강하면 됐지'라는 말은 너무나도 안일하고 무책임하게 들린다. 그래, 그런 말은 무책임한 것이다. 왜 삶을 낙관하기만 하는가.
오늘 만났던 환자는 만 19세의,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었다. 기계공고를 졸업하고 훈련소를 입소했지만 3일 만에 퇴소했고, 그 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집에서만 시간을 보낸다 하였다. 원래 예민한 성격이었는데, 온갖 자극이 잠재적인 불안 요소로 작용하면서 정말, 하지 않아도 될 걱정에 시달리는 청년. 검사가 진행되는 3시간 동안 그는
'틀려도 돼요?',
'못 그려도 돼요?'
'못 맞추면 어떡해요?'
'잠을 못 잤는데 괜찮아요?'
등등의 사소한 걱정을 담은 질문을 쏟아내었고, 검사 종료 시 '더 궁금한 점은 없냐'는 물음에 대해
'검사 신뢰도는....'이라며 말 끝을 흐렸다.
모든 검사는 정신과에서 동일하게 사용하는 표준화된 도구입니다. 검사자, 저에 대한 염려나 걱정은 당연히 접어두셔도 됩니다
일부러 더 또렷한 말투로 답변해 주었다. 누구나 궁금해 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불안도가 높은 그였기에 무엇을 걱정하는지 재빨리 간파하고 안심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검사도, 검사자도, 자신의 일상과 경험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위협으로 인식되는 사람. 그 잠재적인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칩거를 시작한 사람. 꽃처럼 향기로와야 할 나이에 메마른 가지처럼 움츠리기를 선택한 사람.
우리 원장님은 '치료 무용론자'이다. 나 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는 신념을 신봉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렇게 죽이 잘 맞는 우리는 정신과라면 누구나 기대할 수 있는 '상담' 혹은 '치료'와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는, 특히 '병무청'환자들을 만나고 온 날이면. 그들의 이야기를 주절주절 들어주고 싶어질 때가 있다. 어차피 내가 뭔 말을 해 준들, 그들이 삶을 바꾸거나 이 험한 삶 헤쳐나갈 심리적 자원을 만들어 낼 것은 아닐 테지만,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들의 외로움에, 공허함에, 이제야 눈에 밟히기 시작한 삶의 기나긴 고통에.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담아 응답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지루한 삶을 이어나갈 이유와 용기를 얻게 되지 않을까, 안일하고도 순진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DSM-5 : 정신 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 본 매뉴얼에 언급된 증상의 정도에 따라 정신 장애를 특정하고 진단 내린다
*전구기 : 당해질환의 증상이 분명하게 출현함에 앞서서, 불특정의 증상을 나타내는 기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