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천수 Jan 14. 2023

사과 씨의 찐한 러브 스토리

‘좀 노는♬ 화분과 발랑 까진 사과 씨’의 러브♥스토리





        

내가 두 쪽으로 기절시킨 사과 속, 그날따라 유난히 사과 씨가 눈에 띄었다. 갈색의 작은 씨앗을 보면서 이게 과연 사과나무가 될까 하는 궁금증이 솟아났다. 고개를 돌려 창가를 보니 마침 노는 화분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생각난 김에 사과 씨를 발아시켜 볼 생각으로 짙은 갈색으로 덮인 씨앗 다섯 개를 집었다. 그리고 시크한 표정과 도도한 모습으로 버려질 씨앗에 생명을 선사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사과 씨가 싹을 피워낸 그 자리가 어떠한 자리든지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어 또다시 씨앗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자연의 순리를 확인이라도 하듯. 씨앗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꺼지지 않는 생명의 불씨가 남아있는 타임캡슐 일 테니까.


물 먹은 사과 씨


발아 전의 씨앗에는 수분 함량이 5%도 채 안되기 때문에 마치 심폐소생술을 하듯 씨앗을 흔들어 깨워야 한다고 한다. 물론 발아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물이며, 햇빛과 온도, 산소라는 것은 누구나 학습을 통해 알고 있는 상식일 것이다. 평소의 상식으론 씨앗을 흙에 바로 심어도 되겠지만, 나는 사과 씨의 빠른 발아를 위해 널찍한 배달용 플라스틱 용기에 키친타월을 깔고 뿌리가 나면 다시 옮겨심기로 했다. 키친타월에 물을 흠뻑 적신 후 씨앗을 올렸다. 그리고 씨앗 위에 다시 분무기로 물을 뿌려 촉촉하게 마무리한 뒤 뚜껑을 덮어 주었다. 이제부터는 조급함을 벗어나 여유 있게 기다리며 지켜볼 일만 남아있다.





씨앗을 물에 불려 플라스틱 용기에 올린 지 3일 후, 뚜껑을 열었더니 다섯 개의 씨앗 중 세 개가 예쁜 연두색 빛깔의 작은 잎을 내보이며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발아에 성공한 것이다.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주는 사과 씨가 대견했다. 그리고 15일 후, 씨앗은 마치 폭풍 성장한 듯 잎과 하얀 뿌리가 제법 많이 내려 있었다. 그중에서 약삭빠르게 조금 더 크고 똘똘한 모양을 하고 있는 싹이 난 사과 씨. 내가 보기에도 발랑 까진 듯한 사과 씨를 골라 원예용 성토를 듬뿍 담은 후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동안 놀고 있었던 우윳빛 화분 중앙에 자리를 잡아 흙과 함께 묻고 물을 듬뿍 줘서 마무리했다.


나머지 사과 씨는 어쩔 수 없이 플라스틱 용기에서 자랄 수 있도록  흙을 덮고 물을 뿌린 후 생장을 지켜보기로 했다.      


사과 씨가 발아한 모습

'발랑 까진 사과 씨'가 '좀 노는 화분'과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과를 두 쪽으로 기절시킨 후 눈에 들어온 갈색 씨앗에 대한 나의 해학적인 사고와 마침 노는 화분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애정 어린 마음으로 발아한 사과 씨를 우윳빛 사기 화분에 옮겨 심으면서 나는 뜬금없이 그들의 세계에서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인연의' Love Story'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동화 같은 생각을 들춰내었다. 엉뚱한 생각을 하니 상상의 나래가 머릿속에 펼쳐지며 그들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작은 소리 하나라도 놓칠까 봐 귀를 기울여 나만의 스토리를 창작하며 그들만의 달콤한 동거를 응원하기로 한다.




싹을 내민 사과 씨는 노는 화분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받아들이면서 화분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 반가워. 난 자부심 많은 사과 씨야. 앞으로 너와 함께 동거해야 될 것 같은데 괜찮겠어? “

지난겨울에 보랏빛 재스민을 떠나보낸 화분은 그동안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에 새롭게 맞이한 초록 잎이 싱그러운 사과 씨의 방문이 너무 반가웠다. 오랜만에 방문객을 맞은 화분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이지.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어떤 친구가 오나 궁금했는데 이렇게 풋풋한 향기를 품은 네가 오니 너무 좋아. 대환영이야.”     

노는 화분은 더 없는 행복감으로 두 팔을 벌려 안으며 흔쾌히 답을 했다.

“여기 봐. 누가 올지 몰라 깨끗하게 청소도 해 놓았어. 네가 살기엔 당분간 괜찮은 곳일 거야. 네가 더 크게 되면 아마 더 큰 곳으로 옮겨 가겠지만. 그때까진 우리 서로 도우며 행복하게 살아. 그리고 절대 아프지 마.”     

발랑 까진 사과 씨는 부끄러운 듯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좀 노는 화분에게 다소곳이 안겼다.


노는 화분과 사과 씨의 동거


“너의 우아한 우유 빛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어. 그리고 튼튼하고 믿음직스러워. 지금 내가 살기엔 최고의 환경인 것 같아.”

초록빛 새싹을 피운 사과 씨가 활짝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는다.

“사실 네가 오기 얼마 전에 난 예쁜 보랏빛 재스민과 함께 살았어. 그런데 주인이 물을 너무 많이 주어 익사했지 뭐야. 나쁜 사람!”

“그렇지만 넌 내가 잘 보호해 줄게. 네가 좋은 묘목이 될 때까지 수분과 좋은 영양을 아낌없이 줄 거야. 나중에 네가 떠나고 다른 누가 와도 절대 널 잊지 않을 거야. 넌 내게 특별하니까.”     

흔쾌히 보금자리를 빌려 준 화분의 진심 어린 배려심에 사과 씨는 눈시울을 글썽이며 숨겨 두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난 그동안 너에게 의지해서 새싹을 띄우며 새 삶을 얻었잖아. 사람들은 우리 몸만 먹고 나 같은 건 다 버리거든. 그런데 넌 나를 품어 주었어. 나는 운 좋게 너를 만나 소중한 생명을 얻었지 뭐야. 그래서 난, 너 보란 듯이 좋은 사과나무가 되어 봄이면 예쁜 사과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주렁주렁 사과 열매를 맺어 사람들에게 수확의 기쁨을 안겨 줄 거야. 그리고 너와 함께한 날들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

      



시간이 흘러 사과 씨는 튼튼한 가지와 잎을 키우며 제법 의젓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초록 잎새의 사과 씨는 어린 티를 벗고 훌쩍 커버린 사과나무 모양새를 갖추면서 좀 더 큰 화분으로 옮겨가야 할 수밖에 없어 아쉬운 작별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렇게 노는 화분과 발랑 까진 사과 씨와의 짧지만 달콤했던 동거는 끝이 나고, 사과 씨를 품었던 화분은 다시 실직하여 노는 화분이 되어 그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지금까지 사과를 먹으면서 사과 씨를 키워보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정말 우연한 기회에 사과 씨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작지만 감동적인 일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즐겁다. 작은 사과 씨 하나가 피워낸 새 생명을 보면서 나는 자연의 경이로움과 신비함에 경탄하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그 끈을 놓지 않는다면, 작은 씨앗에서 자라난 큰 사과나무처럼 반드시 큰 꿈을 이룰 날이 찾아올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씹어 본다. 그것도 인연이라면 정말 신통방통한 인연 아닐까?

 



오늘 같은 날엔 길을 걸으면서 떨어져 뒹구는 낙엽을 밟으며 짙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만끽해 보는 것도 괜찮다. 아직 가을이 머물고 있는 그곳엔 우리가 나누지 못한 러브 스토리가 있으니까. ‘잘 지내냐고,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는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운 것은 계절 탓인가? 아님 외로움의 사치인가? 창문을 살짝 열고 지나가는 상큼한 가을바람을 품에 안으며 방금 기절시킨 사과 한쪽을 한입 가득 채워본다. 입 속을 가득 채운 달콤 쌉싸름한 사과의 향기와 맛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사과씨의 꿈










매거진의 이전글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