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봇 Oct 20. 2020

17. 난 에세이가 싫다.

B급에서 A급이 되고 싶어졌다.

17. 난 에세이가 싫다.


 20살 초반, 나는 자기계발서는 유독 싫어하는 애였다. 세상살이에 대처하는 처세술부터 '성공하려면 이렇게 해야한다'는 후킹성 제목들로 점철된 에세이 세션은 내가 서점에서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치는 곳이었다. 


 나는 에세이를 싫어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는데 왜 언제나 정답이 있는 것처럼 포장된 글들을 읽어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고(물론 포장은 아님을 지금은 안다), 사람은 완벽히 같을 수 없는데 왜 다른 사람의 일생이 적힌 글들을 봐야하는가에 대한 적잖은 불만도 있었다.


 그 때의 나는 그 사람들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될 것 같았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성공, 인생공식에서 벗어나 나만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선택은 언제나 옳고 좀 더 위대하고 능력있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라는 그런 막연한 생각.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나, 나는 출퇴근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이른 아침 기상으로 피곤한 눈과 사원증을 함께하는 회사원A씨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았고, 9시부터 6시까지 아니, 출근과 퇴근을 위해 좀 더 쏟아붓는 시간까지 더해 7시부터 저녁 7시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한 삶을 사는 '다수와 유사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까지 특별하지 않은 대다수가 된 나는 지하철에서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내가 에세이를 읽기 시작한 데에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에세이의 트렌드가 바뀌었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내가 에세이가 필요해서 였다.




 에세이의 트렌드가 바뀌었다.


 7~8년 전만해도 앞서 말했듯 성공에 대한 이야기와 앞으로의 위대한 일생을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해야한다는 '준비를 강요하는 에세이'가 에세이 세션의 베스트셀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나 많았는지, 20대부터 준비해야하는 내용, 30부터 시작되는 인생, 40은 늦지 않았고, 50에는 챙겨야하는 게 많다는 연령에 따른 지침서가 무지막지 하게 많았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N_cVJrCFU78&t=1s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 - 돈은 어제까지 없는거야?, 돈은.. 계속 없는 거야]


 그래, 인생 살면서 대학 나와서 취업하고 안정적인가 싶으면 결혼하고 집사고 은행 대출 갚다가 안정적이게 될 법하면 아이의 학력을 책임져야 하는 그런 이유 때문에, 결국은 그런 노후 준비, 그리고 그런 성공에 대한 글들이 많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딩크족이라던가, 결혼의 연령대는 점점 늦어진다던가, 인구부족을 이야기하는 저출산 시대가 도래하면서 결국 트렌드는 바뀌었다.


 지금은 다르다. 에세이 세션에 가면 나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책들이 나를 위로해주고 있다. 이미 삶에서 너무나도 많은 선택지들을 접하면서 무엇을 골라야할지 몰라 선택을 포기했더니만,


 '사실은 포기가 정답이었어요!'


 라고 이야기하는 글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포기와 내려놓기를 장려하는 에세이들은 현대인의 삶과 마음을 대변했기에 순식간에 순위를 석권하고 '힐링'이라는 테마를 견인하는 한 큰 물줄기가 되어 있었다.


 이미 일상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와 해야할 일들로 인해 몸과 마음은 진작 지쳐버렸고 '힐링'이라는 단어에 편승해 나를 위해보려고 하니, 진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원하는 게 뭔지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힐링이 과제인 것인양 포털사이트에 물어보거나 할 순 없으니, 눈길을 주게 된 것이 아니나 다를까 책이었더라.


 철학은 어려웠으며 예술은 문외한이었고, 정치나 경제는 생각해야하는 것이 많았다. 소설은 즐거웠지만 비현실적이었고, 그래서 에세이를 선택했다.


 이게 두 번째 이유인 필요해서였다. 

 

 돌이켜보면 인생에는 언제나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부모님과 선생님이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올바름과 그름을 밝혀주는 길라잡이었으며, 대학에서는 먼저 체험해 본 선배가 길을 밝혀주는 사람이었다. 조언을 구하거나 이끌어주는 사람들이 어렸을 적에는 다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앞으로 나가다보면 마주하는 세상은 더 넓어서 모든 사람들이 같은 곳을 가지 않음을 알았다.


 같은 목표를 보면서 가는 '나와 똑같은 사람'은 이제 없었다. 그리고 내 옆에서 같이 가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앞은 너무나도 드넓었고 깜깜했으며, 이 앞에 내 눈에 보이는 동료가 없기에 불안도 했고 가는 길이 맞는지 의심도 들었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없을까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고 그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져 에세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았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다 다르지 않고 이 고민은 누구나 하고 있음'을 말이다.




 그래서 내게 지금은 에세이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사실 지금도 에세이가 싫다. 

 늦은 밤 한장한장 읽으면서 위로받고 있는 나를 보면 '나도 꽤 많이 힘들었음'을 마주했고 꽤나 웅크린 몸이었음을 알았기에. 결국은 내가 사는 삶도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 A와 다르지 않았음을 인지했기에. 10살에 숙제로 보곤 했던 '20년 뒤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적었던 위대해보이는 나와 20대의 그 치기어린 기대했던 '10년 뒤에 나는 좀 더 성공한 사람은 아닐까?' 하는 그 모습은 없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에세이를 찾는다.


 이런 삶에서 후회와 한탄을 하기 보단 보기보다 누구나 하는 고민이었음을 깨닫고 미소지을 수 있기에. 그리고 그런 평범한 A씨가 더 이상은 평범하지 않은 작가 a(알파)씨가 될 수 있음을 보았기에. 비록 10살에 보았던 그는 없지만 지금 29살에 내가 보기에는 조금 더 빛나는 30살이 있기에.


 그래서 나는 에세이를 쓴다. 나 또한 나와 같은 사람들이 쓴 에세이에 위로를 받듯, 나 같이 꿈꿨던 사람 그 a,b,c 그리고 d에게는 내 에세이가 어떠한 원동력이 되기를 바라기에.


 특별하지 않기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음을 있다. 만약 내가 특별한 사람이었고 내가 그래서 글을 썼다면  내가 싫어했던 성공가도에 대한 그 에세이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오늘도 브런치에 들어오고 브런치를 읽고,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보고, 댓글을 쓰고, 그리고 또 한 번 작가의 서랍에 저장만 할지도 모르는 그 글을 쓴다.


 혹시나 내가 발행을 했을 때, 나같은 누군가가 읽었을 땐 이렇게 느끼길 바라기에.



"솔직히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면 불안한데,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은 것에 위로를 느끼려고 해요. 내가 잘못 살았다면 지금 내 주변엔 아무도 없고 아마 내가 보는 그 에세이 마저도 너무 먼 일 같아서 나는 평범하지 않음을 알았겠죠. 그렇지만 불안해서 나 같은 사람을 찾아 온 에세이 코너에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책을 읽고 있으니 안심하려 해요."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를 보냈으니 만족하려고 하며, 그래도 오늘도 글을 하나 썼으니 오늘도 많은 생각을 했구나 라고 정리하려고 한다.

작가의 이전글 16. 3년차 직장인이 본 좋은 선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