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족식. 작은 크기의 명화 그러나 깊은 내용의 명작입니다.
예수님이 제자 한 명의 발을 씻기고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시고 열심히 발을 씻기신 후에, 앞에 두른 행주로 정성껏 제자의 축축한 발을 닦고 있습니다.
화가는 두 명의 주요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크게 그렸는데요. 인물의 대표성과 작품의 주제를 강하게 표출합니다. 마지막 만찬 장에서 행해진 갑작스러운 예수님의 세족식 광경입니다.
예수님은 아래에 계시고 훨씬 높은 곳에 제자가 앉아 있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발을 닦으며 잡고 있는 예수의 손과 제자의 발만 존재합니다. 세족식을 강조하고자 공간을 최대한 절제해 인물을 넣었고 필요한 두 인물의 동작과 표정과 시선을 크게 부각시킵니다.
주님 앞에서 발을 내밀고 있는 제자의 모습과 가장 낮은 모습으로 제자를 섬기는 하나님 예수가 이 그림을 명작으로 만듭니다. 도저히 응할 수 없지만 요구하시니 또 응할 수밖에 없는 제자의 표정이 걸작입니다. 베드로 곁에 그가 내팽개친 신발이 보이죠? 당시 황당했던 제자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 뒤에는 만찬을 나누었던 테이블이 보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근거해 화가가 창작한 제자들의 다양한 모습들입니다. 만찬인데 음식은 보이지 않고 대신 제자들의 표정이 메뉴처럼 올려져 있습니다.
다음번 순서를 알고 있는지 신발을 풀고 있는 제자도 있고, 황송함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라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제자도 있습니다. 반면에 호기심으로 유심히 쳐다보는 제자도 있고, 이 장면을 애써 외면하는 듯한 제자도 있습니다.
어두운 뒤의 배경에서 제자들이 지닌 이런 다양한 표정들은 전경의 예수님과 제자 베드로의 세족식을 더욱 빛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최대한 성경 기록을 참고해 간결하면서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것만 드러낸 작품입니다.
그럼 만찬 장으로 들어가 볼까요? 이 세족식이란 주제의 그림에는 만찬 장소가 나옵니다. 어느 집인지 궁금하죠? 알려지기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누구의 집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미상입니다.
성경의 기록자들 특히 사 복음서 저자들도 어떻게 만찬이 이루어졌는지는 기록했지만 장소 제공자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성경 기록에도 이름 대신에 아무게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마도 당시 노출될 경우 위험이 있어 보안을 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마태복음 26:17-20)
화가에 따라 이 만찬의 메뉴가 다릅니다. 아주 풍성한 테이블이 있는가 하면 이 그림처럼 거의 식사한 흔적이 없는 것 같은 테이블이 올려지기도 합니다.
다양하게 묘사된 테이블을 관객인 입장에서는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매우 중요한 도상을 만찬 음식에 넣어 놓은 경우가 있고 테이블 보에 상징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도상들은 설명을 듣지 않으면 무슨 의미로 그렸는지 정말 알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례의 대표적인 그림이 이태리 피렌체에 있는 산마르코 성당의 벽화’ ‘최후의 만찬”(길를란다요 작)입니다.
이 벽화에서는 차려진 음식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생각할 수 없는 진기한 도상들이 담겨있습니다. 회화사 최초로 해석해 놓은 부분이 많으니 곧 영상과 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역할을 이 흰 천의 테이블 보가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흰 천의 역할은 대략 세 가지로 보입니다.
첫째는 관객들에게 가롯 유다를 정확하게 알려 줍니다. 둘째는 주님의 얼굴을 부각시킵니다. 주님의 짙은 머리카락이 흰색 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얼굴이 잘 드러납니다. 어쩌면 얼굴을 강조하기 위해 테이블에 음식을 보이지 않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식사 자리라는 것은 테이블보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암시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구절대로 식사 중에 일어난 것임을 알립니다. 비록 음식은 많이 보이지 않지만 테이블보가 있음으로 인해 식사 자리인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단순한 테이블 보 같지만 살펴보니 몇 가지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작품의 주인공인 예수님에게로 시선을 돌려볼까요?
분명히 우리와 같은 인간인데 자꾸 하나님이라고 언급하는 것이 이상하죠? 성경 기록에 따른 것인데요. 먼저 대표적인 기록을 읽어 드립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6-8)
기록대로 이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후광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기록대로 표현되어 있어 이 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게 합니다. 제가 왜 구절의 기록을 알려드렸는가 하면요. 화가는 최대한 당시 실제 행했던 세족식 기록대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실제 기록과 이 그림을 비교해 보십시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요한복음 13:4-5)
기록대로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죠? 대야에 물이 떠 있고 발을 씻은 다음 두르신 수건으로 닦고 계십니다. 기록대로 묘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가가 최대한 기록대로 묘사한 것을 살펴봤는데요. 이제부터는 화가가 묘사한 창의적 몸동작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세족식의 중요한 단어는 낮아짐과 서로를 섬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 낮아질 것을 언급합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1)
하나님이신 예수가 이 땅에 사람의 형상으로 찾아오신 것 자체가 최대한의 낮아지심의 모본입니다. 이제는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기 위해 마지막까지 섬기며 낮아질 것을 모본으로 보여주십니다. 이렇게까지 하신 것은 여전히 제자들에게는 이런 낮아짐과 섬김의 자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라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양쪽 무릎을 꿇으시고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제자의 발을 꽉 붙잡으며 수건으로 닦아주십니다. 제자 베드로의 발은 중동의 먼지 나는 땅을 밟고 다닌 냄새나고 땀에 찌든 발입니다.
예수님 허리를 보면 수건이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히 묶은 것이 보이죠? 앞의 왼손을 보시면 강하게 제자의 다리를 감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지에 찌든 발을 닦아 내듯이 원죄를 반드시 사하시겠다는 구속적 사역의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서 한 번 붙잡은 주님의 손은 절대로 놓는 법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십자가 피흘림의 도상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보이세요? 주님은 이 만찬과 세족식이 끝나는 밤에 가롯 유다의 배신에 의해 로마 군병의 손에 넘겨지며 십자가의 죽음으로 향하는 일정을 맞이합니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마태복음 26:47-48)
예수님 무릎 아래에 붉은 천이 보이죠? 이 붉은색 천은 곧 맞이할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왜 이렇게 해석이 가능한가 하면, 세족식에 원죄에서 구원하는 구속의 의미가 있다고 했죠? 원죄를 사하는 것은 반드시 피 흘림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은 예수의 피 흘림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붉은 천 위에 예수가 있는 것입니다.
화가는 이것을 드러내 놓지 않고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비슷한 색으로 바닥을 처리했습니다.
이곳 만찬에 함께한 제자들을 볼까요? 열 두 제자이지만 이 그림에는 열명만 등장했습니다. 숫자를 세어보는 것은 기록에 분명하게 열두 제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마태복음 26:20)
그러나 화가의 표현에 따라 이 숫자가 달라집니다. 이 그림에서는 10명이지만 어떤 그림에서는 만찬에 십 사명 또는 십 오명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음식을 장만하고 섬기는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경우입니다.
이번에는 만찬 후에 예수를 은 삼십 냥에 팔아넘기는 가롯 유다를 보겠습니다. 뒤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제자들이 보이죠? 맨 왼쪽에 있는 제자가 오른쪽 샌들끈은 이미 풀었고 지금 왼쪽 샌들 끈을 풀고 있습니다.
이 제자가 왜 가롯 유다가 될까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그의 몸 앞에 놓인 돈지갑입니다. 그가 계산이 빨랐던 인물인지 열 두 제자 중에서 회계를 담당했었습니다. 돈관리자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기독교 회화에서는 배신의 증거인 은 삼십 냥입니다. 또 하나는 꼭 일정하지 않지만 노란색 의상이나 검은색으로 그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특이한 표현을 보게 됩니다. 왼손에 검은 샌들 줄이 수직으로 잡혀 있죠? 이렇게 신발을 풀고 있는 사람은 업죠? 많은 중세 명화를 살펴봤지만 이렇게 수직으로 줄을 잡고 있는 표현은 매우 특이합니다. 이 수직의 검은 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 그림의 작가가 설명해 놓았다면 정답이 되겠지만 이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관객 마음대로 이 줄을 해석하실 수 있습니다. 혹시 저와 다르게 해석하시는 분이 있다면 댓글로 나눠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왼손으로 매우 강하게 붙잡고 있으며 수직으로 세워진 줄이 해석의 포인트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강하게 붙잡고 있는 손의 표현은 현재 이 인물의 마음이 무엇인가에 강하게 잡혀 있음을 상징합니다.
다음으로는 수직의 상징입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제자들과 관련된 것을 찾아봤는데요. 저는 기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단 저 선으로 말미암아 좌우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회화에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성경 자체인 예수를 중심으로 살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안하면 이 수직의 강한 줄은 자기 자신이 만든 인간적 기준을 꽉 붙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전체 분위기에 끌려 예수께 자신의 몸에서 가장 더러운 발을 맡기고 있지만 정작 마음의 중심은 세상과 자신에게 두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 그림을 해석하며 가롯 유다라는 인물을 공부해 보니 신기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유다란 인물은 성경의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악의 축을 형성하고 있는 점입니다. 우선 이 인물에 관한 기록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육십육 권 중에서 그를 가장 자세히 기록한 곳인 것 같습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사도행전 1:16-19)
이 기록 속의 가롯 유다를 알게 되면 지금 여러분들이 보시는 이 그림 속 공간이 갑자기 성경 전체로 확대됩니다. 장소가 제자들이 긴장된 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다락방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시작된 창조 세계를 지나오며 언제 끝날지 모를 마지막 순간 속에 있는 한 축의 공간 속에 있음을 알게 합니다. 축이라고 하니 무슨 의미인지 이상하죠?
인류는 에덴동산을 나온 후부터 두 개의 축에 의해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악의 계열인 가인의 축과 선한 피의 계열인 아벨의 축입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그림 속 가롯이 쥐고 있는 저 강한 선은 가인의 축에 속한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공포하는 셈입니다. 즉 "나는 악의 축에 있는 사람"임을 알립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화가는 가롯 유다의 몸에 또 다른 특이한 표현을 넣어 놓았는데요. 아래에서 다른 인물과 비교하며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일까 궁금해하실 텐데요. 잠시지만 여러분이 직접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번엔 세족이 거의 끝나가는 베드로를 볼까요? 그의 몸에 표현된 여러 가지 행동이 흥미롭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크게 묘사됐었죠? 오직 그만 크게 묘사되어 있는데요. 이것은 그가 여러 제자들을 대표한다는 의미입니다. 크게 그린 만큼 표정을 더 풍성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보면 다른 제자들보다 세밀한 표정이 얼굴에 담겨있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황망한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손과 얼굴의 표정이며 결정적으로 신발입니다. 신발이 저렇게 흩어져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잔뜩 구부린 허리는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이며 깍지 낀 손가락에는 긴장감이 잔뜩 들어 있습니다. 머리는 수그린 상태에서 쳐다보고 있기에 이마에 주름이 잔뜩 보입니다. 못마땅한 표정 같죠? 이해 못 하는 표정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마음을 미리 읽은 예수님이 지금은 네가 세족식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언급까지 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 …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요한복음 13:7)
베드로가 입은 의상에 유대인 전통 문양이 보입니다. 이 작은 문양으로 이곳이 중동 땅 이스라엘임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이 문양 맨 위에 보면 금으로 만든 것 같은 작은 액세서리가 보이죠? 등뒤로 둘린 녹색 천을 붙잡아 둔 옷핀으로 보입니다. 테이블에 앉은 제자들을 보면 대충 그림 그린 것 같은데요. 전면의 인물에서는 정밀한 표현이 드러납니다.
테이블에서 기다리는 제자들을 살펴볼까요? 다양한 제자들의 표정이 읽힙니다.
왼쪽의 가룟 유다는 유심히 날카롭게 관찰하듯 쳐다봅니다. 손으로 턱을 괴며 쳐다보는 제자가 있고,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애쓰는 제자도 있고, 무심코 지켜보는 제자와 옆의 동료에게 어깨동무하며 이 시간을 견디는 제자도 보입니다. 베드로 뒤에는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쳐다보는 제자도 있네요.
하나같이 어색한 분위기에 긴장한 모습입니다. 참 다양하죠?
이제부터는 인물묘사를 벗어나, 의미나 상징이 담긴 부분을 살펴보며 그림여행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그림감상의 중요한 포인트 중의 하나가 시선입니다. 주님의 시선을 놓치면 헛된 감상이 됩니다 그분의 시선을 쫓아가볼까요?
주님의 시선을 확대해서 쫓아가보면, 그분의 시선은 제자의 더러워진 발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발은, 먼지로찌든 중동땅의 생활을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다녔던, 죄로 물든 생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선을, 때묻은 발에 두지 않으신다는 의미는, 우리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심을 의미합니다. 더럽다고 피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긍휼함으로 보십니다.
예수님 바로 앞에 있는 베드로의 시선은 어떤가요? 베드로의 시선을 보면, 이화가가 인간의 깊은 내면을 표출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사이라는 주제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소주제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모르고 지나는 부분입니다. 혹시 주님과 제자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세요? 물입니다.
보시면, 원죄로부터 인류를 살리는 예수의 생수는, 예수 왼팔 곁에 있죠? 반면에 이미 원죄로 가득한 대야의 물은, 베드로의 발에 있습니다. 화가는 의도적으로 예수와 제자사이에, 두 종류의 물을 토기병과 대야로 구분해 넣어놓았습니다. 만찬에 사용된듯한 토기병의 물을, 사람을 살리는 예수의 생수로 활용한 점이 돋보이는 표현입니다.
생수의 원천이 예수임을 밝히기 위해, 토기병을 예수의 몸에 붙여놓았죠? 대비되는 좋은 표현력입니다. 이렇게 중세명화 속에는 인물과 인물사이에, 상징을 넣어놓는 경우가 있으니 세밀이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보고 또 봐도 참 좋은 표현입니다.
이 작품 속에는 서로대비되는 얼굴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롯유다와 예수님을 따라 순교했던 베드로입니다. 이마에 주름이 있는 것도 비슷하며, 가냘프게 그려진 눈 또한 비슷합니다.
눈과 달리 그들의 손은 전혀 다릅니다.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 내린 가롯 유다의 움켜쥔 손과, 순교하기까지 그저 감사한 마음을 지닌 베드로의 깍지 낀 손입니다.
발을 씻는다는 그림으로만 알고 있는 이 작품에 정말 많은 성경적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중세 명화의 가치를 느끼게 하는 크기가 작은 귀한 작품입니다.
우리가 관람한 그림과 같죠? 쌍둥이 그림입니다
그러나 제작연도가 1858년이며 예수님의 옷의 색이 다르며, 팔의 소매표현도 다릅니다. 그리고 액자 아래에 성경구절도 적혀있습니다.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그림이 처음발표됐을 때, 여러 가지 비평이 있어 한동안 작품이 팔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작품이 조악하다는 평도 있었고, 관객의 보는 시점이 너무 낮다는 비평도 있었고, 장소의 협소함과 밀폐된 것도 비판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처음에 예수님이 의상을 입지 않아 비평을 받아서 다시 그렸다고 하네요. 이런 표현 역시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요. 중세가 아닌 근대에 그려진 작품인데 당시 엄격했던 신앙규범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스케치가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관람이 가능한데 미리 약속 시간을 잡으셔야 합니다. 간혹 미술관에 관심이 많은 작품을 보러 가실 때에 미술관 측에 연락해서 이런 스케치나 참고되는 밑바탕의 그림이 있는지 살펴보시고 문의하셔도 됩니다.
미술관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작품을 연구하려는 관객에 대한 서비스가 항상 갖추어져 있으며 문의하는 분들을 정말 반갑고 친절하게 응해 주십니다. 필자는 한 작품에 대해 문의를 드린 적이 있는데 직접 이메일로 답장을 받았고 해상도 높은 파일을 선물로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작업 환경은 미술이란 예술을 사랑하게 하는 큰 요인이 됩니다.
지난번 영상에 화가의 서명에 대해 알려드렸죠? 혹시 이 작품에서 서명에 해당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매우 작지만 식탁 중앙에 어깨동무한 제자들 바로 앞에 보시면 흰 접시 속에 글자가 보입니다. 명확하지 않지만 서명으로 간주됩니다.
신기하죠? 중세 명화를 보실 때는 눈을 크게 떠야겠습니다.
그림을 떠나며 바라보면, 한 곳이 눈에 띕니다. 당황했고 황송한 마음을 드러내는 신발입니다. 신발을 자세히 보면 내 마음대로 다녔던 생각과 마음이 묻어있습니다. 내가 만든 내 기준이었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죄인인 제자보다 더 고개 숙인, 창조주가 그려진 중세명화입니다.
저는 다음 그림여행을 준비해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주님의 평안에 머무시길 기도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흩어진 중세명화를 찾아 그 내용을 세밀이 살펴보는 새로운 유튜브 명화소개 글. <내 집은 미술관> 제공이었습니다.
"발길을 옮기면
곧
중세로 향하는
문이 있는
유럽에서 인사 전합니다"